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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에 은퇴자금 쏟아 붓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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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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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

인도의 어느 마을, 몹시 가난한 가정이 있었다. 좁은 집에서 할아버지·할머니, 자식과 손자들까지 모두 한 방에서 지낼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가난 속에서도 따뜻한 마음을 지녔던 이들은 혹시 손님이 찾아올 때를 대비해 모자라는 식량임에도 일부를 따로 보관하는 습관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찾아오는 손님은 거의 없었다. 손님을 위해 비축해놓은 식량은 항상 남았다. 그들은 그 식량이 어느 정도 쌓이게 되면 상하기 전에 시장에 나가서 돈으로 바꾸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큰 돈이 저축돼 있었고, 근처 마을 사람도 그들을 따라 하게 되면서 다른 마을보다 훨씬 잘 살게 됐다고 한다.

단순한 이야기 같지만 우리에게 ‘차곡차곡’의 중요성을 잘 알려준다. 예로 든 인도보다 한국은 훨씬 잘 산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만 보면 안다. 전 세계에서 잘 사는 나라로 꼽히지만 노후 준비만은 그렇지 않다. 한국 노인의 50%는 빈곤층에 속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상위권이다. 한국보다 고령화가 먼저 시작된 일본의 노인층 빈곤율이 20%대인 것을 감안하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지 알 수 있다.

많은 사람은 노후 준비를 못 하는 이유로 ‘여유자금의 부재’를 꼽는다. 하지만 진짜 그런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나는 한국인의 노후 자산을 갉아먹는 대표적인 요소로 사교육비를 꼽는다. ‘자식 사랑’이 유별난 한국에서 자녀 1명을 대학까지 졸업시키는 데 드는 비용은 대략 3억원. 이 중 상당수는 사교육비다. 문제가 지적된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매일매일 별생각 없이 낭비하고, 체면을 중시하는 잘못된 소비 문화 또한 ‘먹고 살 걱정 없는’ 노후를 위협한다. 그렇다. 실제 원인은 여유 자금의 부족이 아니고, 노후 준비에 대한 교육과 훈련 그리고 철학의 부재로 봐야 한다. 노후 준비는 단순히 돈을 모으는 문제만은 아니다. 배워야 하고, 연습을 해야 하며, 돈에 대한 철학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교육 분야의 획기적인 수술이 필요하다. 이상하게도 이 높은 교육열 속에 ‘돈’에 관한 가르침은 없다. 세계는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는데 우리의 교육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이 경쟁력 없는 교육 시스템에 부모의 은퇴자금을 무한정 쏟아 붓는다. 그래서 자녀가 행복하다면 또 모를 일이다. 대학 입시의 노예가 돼 ‘내가 왜 공부를 하는지’도 망각한 채 집단 우울에 빠져 있는 게 요즘 학생들이다. 이 무한경쟁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아이들이 냉소적으로 변해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좋은 수능 점수를 받고, 좋은 대학에 가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안일한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부모가 먼저 그래야 한다. 이전까진 이 공식이 통했을지 모르나 앞으로는 아니다.

미국에서는 흔한 은퇴 준비를 위한 몇 가지 조언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당장 시작해야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유대인들은 어린 아이에게 일찍부터 돈을 가르쳐주고 경제 공부를 시킨다. 둘째, 과소비를 투자로 전환해야 한다. 한국의 특성에 맞게 설명한다면 사교육비를 노후 준비를 위한 투자로 바꿔야 한다. 예로 든 인도 가정처럼 소득의 10% 정도는 노후 자금으로 비축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셋째, 투자 타이밍을 맞추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먼 훗날 은퇴를 위한 자금이라면 장기적으로 위험을 감수하고 시장의 변동과 관계없이 꾸준하게, 규칙적으로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단기 투자 습관을 버리고, 원금 보장에 대한 집착도 버려야 한다.

미국에는 401(K)라는 노후준비제도가 있다. 소득의 10%를 노후를 위해 투자하도록 하는 제도다. 세금 혜택이 있기 때문에 가입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는 실제로 많은 미국인이 노후 준비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한국에도 비슷한 제도가 있다. 최근 많은 기업이 퇴직연금을 도입하고 있고, 연금펀드제도도 있다. 꼼꼼히 따져보면 단점보단 장점이 많은 제도다. 제대로 활용을 해야 한다. 먼저 생각과 행동부터 바꿔야 한다. 노후 준비가 제대로 돼야 국민 개개인이 행복하고, 국가 전체적으로 건강해진다. 노후는 특정 세대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20~30대도 언젠가는 늙는다. 준비는 습관이고, 좋은 습관은 반성에서 시작된다.

존 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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