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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새 축구장 132개 넓이 해변이 사라졌다…“집이 잠겨버릴 것 같심더” 불안에 떠는 주민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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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바닷가 주민 삶 위협하는 동해안 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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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까지만 해도 10m에 가까운 해변이 있었던 경북 경주시 감포읍 나정항 바닷가가 변화한 모습. 현재 나정항 주변은 해안 침식이 심각한 수준으로 바다와 인근 민박집의 거리가 1m에 불과하다. 최근엔 바닷물이 들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자갈을 퍼붓고 테트라포드까지 쌓았다. 하지만 파도가 심한 날이면 여전히 바닷물이 민박집 앞까지 튀어 올라 주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다. [사진 경상북도]

경북 경주시와 울산시 접경의 경주시 양남면 하서리에 사는 김미선(64)씨. 그는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 개 2마리와 함께 해변을 걷는다. 김씨가 해변을 산책한 것은 올해로 37년째다. 그런데 이 마을의 해변 풍경은 그동안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다.

정동진 레일바이크 100여 m 무너져
“관광객 3분의 2 정도 줄었어요”
항구에 방파제 생겨 모래 흐름 막혀
강 수중보 영향 바다로 가는 모래 줄어
주문진 소돌해변 백사장 30m 조성
1년 반 만에 2~3m 불과, 90억만 낭비

이곳은 원래 하서해수욕장으로 불렸다. 과거엔 2㎞ 떨어진 수렴리 인근까지 그림 같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최근 현장을 가 보니 백사장은 간데없고 방파제를 쌓을 때 쓰는 테트라포드만 가득했다. 더 이상 하서해수욕장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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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장은 사라지고 자갈만 남은 경주시 양남면 하서리.

김씨는 “예전엔 산책할 때면 개들이 모래 위를 신나게 뛰어다녔다. 여름에는 외지 사람이 많이 찾아와 해변에 돗자리를 깔고 놀았다”고 회상했다.

집 앞 백사장이 사라지면서 버려진 주택도 있다. 경주시 감포읍 나정항 바닷가에는 80여㎡ 크기의 민박집과 낡은 주택 한 채가 위태롭게 서 있다. 민박집 주인 이모(81) 할머니는 요즘 시름이 깊다. “바다(해안선)가 자꾸 뭍으로 가까이 들어와 백사장을 다 가꼬가 부렸심더. 그래 가꼬 민박집 손님도 다 쫓아내고 인자(이제)는 내 집까지 빼앗아 갈라고 카네예. 해녀 탈의실도 보이소. 걱정 아입니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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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 탈의실과 바다와의 거리는 채 1m도 되지 않는다. 대문을 나서면 바로 바다인 셈이다. 파도가 심한 날이면 바닷물이 민박집 앞으로 튀어 오른다. 이 할머니는 “최근 3년간 10번도 넘게 자갈을 사다가 집 담과 바다 사이에 퍼다 부었지예. 바다가 그만 들어오라고예. 이러다가 집이 바다에 잠겨 버릴 것 같심더”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경주와 울산 쪽 동남 해안에서 지진 공포가 퍼지는 와중에 동해안에선 해안 침식(浸蝕)이 바닷가 주민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바닷가의 해안 지형은 폭풍·해일 등으로부터 육지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침식으로 해안선이 후퇴하고 연안 수심이 깊어지면 피해가 고스란히 주민들에게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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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 침식 영향으로 올 초 100m가량의 레일바이크 선로가 무너진 정동진 해변.

국내 대표적인 해맞이 명소인 동해안 정동진의 레일바이크는 지난 1월 선로 100여m가 무너졌다. 8개월이 지난 지금도 전체 5.1㎞ 중 절반인 2.8㎞ 구간에서만 바이크가 다닌다. 정동진 레일바이크 선로가 무너진 것도 해안 침식 때문이다. 정동진에선 바다가 20~30m 길이의 백사장을 집어삼켰다. 이 때문에 주변 지반이 약해졌고, 원래 백사장 뒤편에 있던 옹벽이 무너지며 선로 붕괴가 이어졌다.

정동진에서 수퍼마켓을 운영하는 강세호(63)씨는 “전에는 레일바이크를 타러 관광객이 많이 왔다. 하지만 연초에 선로가 무너지면서 3~4개월간 영업을 제대로 못했다. 그 무렵 관광객이 3분의 2 정도 줄었다”고 하소연했다.

본지 특별취재팀은 지난 6~8월 두 달간 동해안 해변 침식을 심층 분석했다. 강원도·경상북도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 최근 5년간 경북 55만2317㎡, 강원도 39만4341㎡ 등 동해안 120여 곳에서 94만6658㎡의 해변이 사라졌다. 서울월드컵경기장 축구장(면적 7140㎡) 132개에 해당하는 광활한 땅을 바다가 삼킨 셈이다.

◆바다는 죄가 없다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해변은 침식현상이 가장 심각한 해변 중 하나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 백사장 길이는 50m가 넘었다. 하지만 현재 해변 길이는 고작 20m 남짓이다. 일부 지역은 모래가 바다로 쓸려 나가 높이 2m가량의 절벽이 생겼다. 바닷속도 모래가 없긴 마찬가지다. 취재팀이 물속으로 들어가자 바닥엔 어른 주먹 크기의 자갈이 가득했다. 사실상 해수욕장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주민 남순덕(47·여)씨는 “그 넓던 백사장이 죽변항 방파제가 생긴 이후 없어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실제 봉평해변은 해안 북쪽 죽변항에 큰 방파제가 들어서면서 모래의 흐름이 막혔다. 동해안의 여름철 파도는 남동쪽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친다. 이 파도를 타고 남쪽 해변의 모래가 북쪽으로 이동한다. 겨울에는 반대로 북동쪽에서 남서쪽 방향으로 파도가 움직인다. 이에 따라 여름에 북쪽으로 갔던 모래가 다시 남쪽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방파제가 생기면서 남쪽으로 돌아가야 할 모래가 항구 안쪽에 그대로 쌓이고 있다.

하천에서 바다로 가는 모래 공급이 줄어든 것도 원인이다. 경북 울진군 산포리 일대가 대표적이다. 이 지역 해변은 오랜 기간 인근 왕피천에서 많은 모래를 공급받아 왔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왕피천에 21개의 보(洑)가 건설되면서 모래 공급에 큰 타격을 받았다. 그 결과 2010~2015년 5만2038㎡의 해변이 사라졌다.

해안도로도 침식의 주범 중 하나다.

국내 해안도로는 육지보다 바닷가 쪽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건설되는 게 일반적이다. 도로를 떠받치는 옹벽을 보통 백사장 위에 건설한다. 토지 보상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다. 그러다 보니 백사장 면적이 좁아져 해안 침식의 원인이 되고 있다. 진재율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동해침식연구실장은 “백사장이 좁아지면 파도의 충격을 흡수해 주는 완충지대가 줄어들게 된다”며 “해변이 파도 에너지를 충분히 흡수해 주지 못하니 침식이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예고된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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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 폭이 2~3m에 불과한 강릉시 주문진읍 소돌해변.

강릉시 주문진읍 소돌해변은 4년 전 4만4414㎥의 모래를 대량으로 들여와 백사장 30m를 억지로 만들었다. 세금만 90억원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1년6개월 만에 해변 폭이 2~3m에 불과한 곳이 생겨날 정도로 다시 침식현상이 벌어졌다. 주민 김광태(42)씨는 “건설업 하시는 분들이 모래가 안 빠져나간다고 했어요. 그땐 믿었죠. 그런데 결국 다 헛일이 됐어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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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팔경 중 하나인 월송정 인근 해송 보호를 위해 침식 방지 공사가 한창인 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관동팔경(關東八景) 중 하나인 월송정이 있는 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도 헛돈만 쓰고 효과가 의심되는 곳이다. 현재 월송정 앞의 해송 군락지와 바다의 거리는 불과 20여m다. 모래가 쓸려 내려가면서 해안의 해송들이 쓰러지고 있다. 뿌리까지 드러난 해송도 있다.

이 지역은 침식 D(심각)등급 지역이다. 해양수산부의 연안 침식 모니터링 결과를 바탕으로 정해지는 침식 등급은 A~D까지 있다. A는 양호, B는 보통, C는 우려, D는 심각이라는 뜻이다. 결국 월송정 일대에선 2014년 2월부터 침식 방지 공사가 시작됐다. 내년 12월까지 국비 등 264억원이 투입된다. 수중 방파제 800m를 설치하고 해안가에 모래 7만6000㎥를 쏟아부을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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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 침식으로 대형 싱크홀이 생긴 강원도 고성군의 한 아파트.

삼척시 원평해변 주변의 사정도 비슷하다. 이곳은 인근 궁촌항 개발 이후 해안 침식이 본격화됐다. 수령 150년이 된 소나무 170여 그루가 파도에 쓸려 내려갔고, 2013년부터 3년 연속 해안 침식 D등급에 지정됐다. 2013년 2월 침식 방지 공사를 시작해 내년 1월까지 수중 방파제 360m를 올리고 8만㎥의 모래를 해변에 쏟아부을 계획이다. 그러나 주민들은 반신반의하고 있다. 주민 김갑배(66)씨는 “4년째 공사가 계속되고 있는데 아직 별다른 효과를 못 느끼고 있다. 2019년 모든 공사가 끝나더라도 해변이 예전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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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해안 침식 막는 구조물 연구보다 모래 훼손 처벌 강화, 엄격 관리를”
② 모래 채취 ‘광업권’ 가진 업체 있어 항구 준설도 지자체 맘대로 못 해



경북도와 강원도는 해안 침식을 늦추기 위해 약 9000억원의 예산을 쏟아붓고 있다. 파도를 막는 수중 방파제를 설치했고 침식이 일어나는 해안에 꾸준히 모래도 공급하고 있다. 하지만 실패는 반복되고 있다.

강릉 시민환경센터 심헌섭 사무국장은 “해안에 모래를 보충하는 것이나 수중 방파제를 설치하는 것은 해안 침식의 속도를 늦출 뿐 근본적인 대책이 못 된다. 자꾸 세금만 쏟아부을 게 아니라 새로운 공법을 개발하자”고 제안했다.

침식 막아라…이탈리아·스페인·미국도 정부 차원서 관리

이탈리아 베네치아~시칠리아 주변 해안은 관광·휴양지로서 가치가 매우 높은 곳이다. 하지만 이들 지역을 포함해 총연장이 7만5000㎞인 이탈리아 해안의 23%(1만7250㎞)에서 해안 침식이 진행 중이다.

이탈리아의 백사장은 국가 소유이지만 해안 방호는 지방자치단체 책임이다. 이에 따라 방호사업의 초기비용은 중앙정부가, 유지관리비는 지방정부가 부담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지자체들은 해안 침식을 막기 위해 연안통합관리계획까지 수립했다.

구체적으로 보면 ▶백사장 양빈(해안 복원 공법)과 해안 침식 방호 ▶주민과 관광객의 이용 조화 ▶자연경관이 수려한 해안 보호 및 가치 극대화 ▶자연생태계 모니터링 ▶주변 지자체와 공조 및 업무 조율 등이다. 이 계획의 핵심은 침식을 막고 해변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데 있다.

스페인도 해안 침식이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자 1988년 해안법을 전면 개정해 중앙정부의 역할을 강화했다. 침식이 일어난 해변에 모래를 공급하는 양빈 공법과 해안 공사비용 대부분을 중앙정부에서 지원한다.

해안선 연장이 13만5600㎞인 미국은 알래스카주(州) 7만6100㎞를 제외한 해안의 33%가 백사장을 포함하고 있다. 이 중에서 전체의 24.3%인 3만3000㎞ 해안에서 침식이 발생하고 있다. 알래스카주를 제외할 경우의 침식 해안 비율은 41.7%다. 미국은 침식이 발생하는 지역을 4등급으로 나눠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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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삼척·경주·울진 특별취재팀=김윤호·박진호·한영익 기자 park.jinho@joongang.co.kr
드론 촬영·사진=김우진·공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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