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은 한말최후의 민족혼"|순국비 건립계기로 본 그의 생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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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구한말의 항일 선비상을 대표하는 면암 최익현선생의 순국비가 최후의 항일혼을 불사르며 죽어간 적지 일본 대마도에 건립, 3일 제막됐다.
대마도 순국비 건립을 계기로 면암의 항일 행상과 우국충정의 기개를 다시 한번 살펴본다.
한말의 격동기 속에서 최후의 선비상을 보여주었던 면암 최익현(1833∼1906).
철종때 과거에 급제, 10년동안 관직생활을 했던 면암은 대원군권세가 천하를 호령하던 고종3년에 관직을 물러난후 일본땅 대마도에서 74세로 순국할 때까지 험난한 망국의 세월을 살았다.
면암이 일본세와 처음으로 충돌하는 것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 때다. 그는 병자조약이 있기 한해전인 1875년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임시로 풀려나와 고향 포천에 머물다 조약체결 움직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광화문에 나가 「지부상소」를 올렸다.
도끼상소는 아직 죄인의 몸으로 감히 임금 앞에서 상소를 올리니 만일 상소가 부당하면 당장 갖고간 도끼로 목숨을 거두어 달라는 각오를 폈던 것이다.
그는 상소문에서 ①힘의 약세를 보이면서 화친을 구하면 결국 적의 침략을 받게된다 ②농업생산품(한국)과 공업생산품(일본)의 교역은 농업국의 경제를 파탄케 한다 ③일본영입은 전통질서를 무너뜨린다라고 공박하면서 조약체결을 반대했다.
이때 면암의 나이 44세. 물론 그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대신 징벌을 받아 다시 흑산도로 4년 유배형의 길을 떠났다.
흑산도 4년 유배를 마치고 나온 그는 고향에서 후학 양성을 하다가 김홍집이 일본서 갖고온 주일본청국공사관원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보고 전국의 유학자를 움직여 위정척사의 만인소를 올렸다.
모름지기 조선의 백성이면 일본세를 반대해야하다는 것이 상소의 요지였다.
최익현의 이같은 민족혼 소취운동은 당시 비틀거리는 한말사회의 높은 횃불이었다.
1895년 「한말사」의 종장을 알리는 단발령이 내려지자 면암은 유림의 대표로 나서 식음을 전폐하면서 실력투쟁에 들어갔다.
이런 난국을 극복하려는 방책으로 중앙정부는 포천향교에 들어있는 면암을 잡아들여 강제로 머리를 깎아 저항의 불길을 끄려했다.
그러나 그는 단발령 주창자인 병무대신 유길준을 향해 『내목은 자를 수 있어도 상투는 자르지 못할 것』이라고 단연히 버텼다.
민중의지의 구심점이 돼있던 최익현을 자기편에 끌어들이려는 기도는 대원군에게도 있었다.
한때 서로 맞서던 대원군은 갑오경장이후 잠깐 권좌에 복귀했을때 가장 먼저 최익현을 찾아 호조판서를 주면서 협력을 구했다.
면암은 70이 다된 노령에 고향 포천을 떠나 지금 그의 사당이 지어져있는 충남청양의 깊은 산꼴로 이사했다. 그는 이곳을 중심으로 대치고개를 넘나들며 이곳저곳의 의병 선비들과 만나 망국의 길에 처한 선비의 길을 강론했다.
그는 마침내 충청도 의병의 재봉기를 격려하고 자신은 전라도 태인으로 내려가 임병찬 등을 거느리고 무력봉기를 일으켰다.
면암은 이미 74세의 노령이었지만 『한가닥 남은 목숨이라도 적과 싸워 죽겠다』는 결심과 함께 정읍정창· 곡성등지의 관아를 습격했다. 그는 순창에서 관군을 맞아 싸우다가 체포됐다. 이때 일본군 의병토별대가 뒤에 서고 조선군이 앞장선 것을 보고 의병들에게 『내가 나를 칠 수는 없다』라고 말하고 스스로 전투를 포기한채 일군에게 붙잡혀 대마도에 끌려갔다.
면암은 대마도에서도 굳은 절개를 보이며 단식을 감행하다 1906년11월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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