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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던 학생이 밝아진 건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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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7호 30면

10여 년도 넘는 오래 전 일화이다. 강의실 뒤편에 말 없이 앉아 있는 학생이 있었다. 얼굴 표정에도 변화가 없고 동료와 대화를 나누는 일도 보지 못했다. 머리를 숙인 채 책상을 내려다보는 경우가 잦았으니 수업 토론 참여에도 소극적이었다. 다가가서 질문을 던지면 작은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다른 학생들에게 그가 친한 친구가 누구인가를 물었지만 모두 잘 모른다고 했다. 학과의 학생모임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동료와 소외된 채로 태양처럼 타올라야 할 젊음의 대학시절을 보내고 있는 것 이었다.


강의 전후에 시도하는 내 개인적인 말 걸기에도 수동적인 응답이 고작이었다. 그때는 교수가 관심을 보이면 학생들은 반기며 열정적으로 응답하던 시절이었다. 의도적 행동이 아니게끔 신경을 쓰며 꾸준히 이야기를 시도했다. 햇볕이 좋은 날엔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는 미당 서정주의 얘기도 던지고, 비가 오는 날엔 수업을 때려치우고 소주와 빈대떡이나 먹으러 가면 좋겠다며 수다를 떨었다. 시간이 가며 그가 어머니와 함께 살며 경제적으로 어렵고, 시를 좋아하고 또 쓰기도 하는 걸 알게 되었다. 차츰 어색해도 서로 먼저 인사하며 지난 주일의 안부를 전하게 됐다.


4학년 어느 날 학생들과 한잔하러 주점으로 갔었다. 모두가 시골장터처럼 떠들썩하게 이야기로 목청을 돋우며 주저 없이 붉게 물들어 간 유쾌한 시간이었다. 그 학생의 주머니에 습작 시가 있다기에 필자가 탈취하여 낭독회를 갖자고 제안했다. 예쁜 아나운서 지망 여학생이 테이블 위에서 그 시를 낭독했다. 우리는 박수를 치고 환호하며 즐거워했다. 그의 불콰한 얼굴에 번지던 웃음과 표정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가 소외라는 밀실의 문을 열고 타인과 어울려 사는 광장으로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장교로 군대에 갔는데 군사훈련동안 외부로 쓰는 첫 번째 편지를 필자에게 보내왔다. 어려운 상황 때문에 '의기소침'이 자신을 지배했다는 것, 필자와 동료 학생들과의 어울림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통해 의미있는 가치를 추구하는 삶의 태도를 찾았다고 했다.


소통이란 무엇일까?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은 저서『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해 ‘인간은 가치와 의미를 좇아 사는 존재’라고 했다. 소통은 타인의 가치와 의미를 인정하고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행위다. 프랭클은 히틀러라는 악마가 만든 유대인강제수용소의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그는 아우슈비츠의 참혹한 와중에서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품고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생존하는 것을 관찰했다. 그 경험을 토대로 의미의 발견과 형성, 유지를 통해 우울병과 같은 마음의 질환을 치료하는 정신치료법을 개발하고 책을 썼다. 능동적인 실존과 철학적인 통찰을 지닌 이 책은 24개 언어로 1억 부 이상 판매됐다.


김춘수라는 시인은 '꽃'이라는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의미)이 되었다’고 했다. 소통은 타인의 이름을 불러주어 의미가 되게 하는 것이다. 개인에게 심리적으로 위협감, 불균형,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이를 제거하는 방법을 통해 태도변용의 설득을 성취한다고 설명하는 서양의 주요 설득이론과는 접근도 차원도 다르다. 소통은 인간의 가치를 배려하고 공동체의 희망을 고양한다.


김정기한양대?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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