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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식견과 절제의 인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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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약 열흘 전에 유민 홍진기형이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중이라는 전갈을 처음 받았을 때만 해도 깜짝 놀랐지만 가볍게 치르고 회복되겠지 하는 생각을 가졌었읍니다.
유민의 건강이 어느 한군데 걱정할 데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바로 수일 전에 종일 같이 운동하고 식사하며 환담을 나누었던 까닭에 설마 하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평소 유민은 건강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조심하고 오히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는 입장이었읍니다.
병원에 가서 중태라는 사실에 접하고서야 망연실색 하였던 것입니다.
불과 열흘 정도에 드디어 유명을 달리하고 나니 정말 믿어지지 않으며 허무감을 어찌할 수가 없는 심정입니다.
유민과는 정말 긴 교분을 가져왔읍니다.
30년을 훨씬 넘도록 친구를 넘어 친형제와도 같았고 온 가족을 포함했을 뿐 아니라 대를 이어 연장되어가고 있는 형편이었읍니다.
이 슬픔과 이 아픔을 호소할 데가 없는 것이 원망스럽습니다.
생각해 보면 유민은 일과 교지와 가정생활을 통해서 진실한 식견과 절제의 인사였읍니다.
지식이 넓고 깊은 사람은 흔히 볼 수 있읍니다마는 거기에 명석한 판단력을 갖춘 사람은 드문 것이고 그 판단을 현실에 적용해서 살릴 수 있는 사람은 더욱 드문 것인데 이러한 사람일수록 모든 일에 여유를 가지고 처해 나갈 수가 있는 법입니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유민이 언제 무슨 일을 당해서나 여유를 잃고 당황하는 것을 본 일이 없읍니다.
언제나 조용히 담담하게 물이 흐르듯이 모든 일에 대처해 나갔읍니다.
긴 세월동안 여러 가지 변천이 있었으나 조금도 변하지 않았읍니다.
공직에 있을 때나, 언론계에 진출해서나 누구에게서나 믿음을 받고 존경을 방은 것은 바로 이 뛰어난 식견에서 유래한 것이며 그 결과가 한 일마다에서 이루어 놓은 큰 업적인 것입니다.
사람은 능력이 뛰어나고 의욕이 강할수록 만사에 지나치기 쉽고 그 이치를 모르는바 아니지마는 자기를 절제한다는 것은 지난한 것인데 유민은 공에서나 사에서나 지나침이란 생각할 수 없는 인품이었읍니다.
자제를 해도 남보다 뛰어난 능력과 의욕이 그렇게 할 수 있게 한 점도 있겠지마는 그것은 오히려 지나침이 없는 원만을 추구하는 인품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또한 절제는 일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기쁨이나 슬픔이나 분노에 있어서도 어김없이 지켜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읍니다.
지난날 우리들이 다같이 수년간 인생의 나락에 빠져 자신의 힘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절망에 신음했을 당시 유민의 그의 연한 자제의 모습은 얼마나 감명과 위로를 주위에 주었는지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읍니다.
뛰어난 식견과 훌륭한 절제의 인사, 유민은 이제 가셨으니 귀중한 배움과 ,따뜻한 교분의 회상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다행히 독실한 신심에 의해서 왕생극락하셨을 것이며 남기신 4남2여 또한 빠짐없이 뛰어나고 화합하니 능히 뒤를 빛낼 것입니다.
삼가 유민의 명복을 빕니다.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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