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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광산서 뭘 캐냐, 나와 함께 혁명 광산 채취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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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푸군관학교 기요비서 시절의 천리푸(앞줄 왼쪽 여섯째). 앞줄 오른쪽 셋째가 장제스의 특무처장 양후(楊虎). 천리푸와 양후 사이의 여인은 양후의 부인과 군통(軍統)국장 다이리(戴笠)의 연인을 겸했던 천화(陳華).

1924년 1월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 국민당과 공산당이 손을 잡았다. 합작에 성공한 쑨원(孫文·손문)은 군벌정부 타도에 앞장설 혁명군 양성이 시급했다. 건군(建軍)을 위해 군관학교 설립을 서둘렀다. 상하이 증권교역소 폐쇄로 빈털터리가 된 장제스(蔣介石·장개석)를 주비(籌備)위원장에 임명했다.

사진과 함께 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94-

장제스의 혁명세력 합류는 늦은 편이었다. 경력이나 실력면에서 대선배들이 수두룩했다. 천치메이(陳其美·진기미) 외에는 이렇다 할 후견인이 없었다. 황푸(黃?)군관학교 교장이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충성스런 부하와 학생들의 극성맞은 지지를 등에 업고 국민당의 군정대권을 장악했다. 당 조직과 특무기관, 금융기관을 좌지우지 했던 천커푸(陳果夫·진과부)와 천리푸(陳立夫·진립부) 형제의 공이 컸다.

군관학교 교장 초기, 장제스는 어려움이 많았다. 상하이에 있는 천커푸에게 지원을 호소했다. “생도들에게 입힐 군복은 커녕 모자와 신발도 없다.” 천커푸는 폐결핵 재발로 입원 중이었다. 장제스의 편지를 접하자 환자복을 집어 던지고 거리로 나섰다. 상하이에는 없는 게 없었다. 군복 500벌과 군화·탄띠 등을 단숨에 구했다. 군용물자라며 까다롭게 구는 세관원들은 매수해 버렸다. 군수물자 구매와 운송을 위해 해운회사와도 손을 잡았다.

군복만이 아니었다. 각종 설비는 물론이고, 당장 전쟁에 동원 가능한 말도 3필이 고작이었다. 중국산 말은 네이멍구(內蒙古)나 신장(新疆)에 가야 제대로 된 것을 구입할 수 있었다. 거리가 멀고 운송 수단도 문제였다. 천커푸는 전장(錢庄)과 증권교역소 시절에 사귄 인맥을 동원했다. 경마장에서 도태된 말들을 헐값에 사들여 광저우로 보냈다. 경주용에는 적합하지 않은 말들이었지만 군사용으로는 손색이 없었다.

장제스를 통해 천커푸의 활약을 보고받은 쑨원은 기분이 좋았다. 천커푸에게 친필 서신을 보냈다. “황푸군관학교 모병위원에 위촉한다. 모병은 군수물자 조달보다 더 힘든 일이다. 혁명은 종교와 다르다. 진실된 사람을 찾으려고 애쓰지 마라. 없기도 하지만, 언제 변할지 아무도 장담 못한다. 새로운 역사는 적당히 황당하고, 성실과 교양을 겸비한 사람들의 열정에 의해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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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해혁명 초기의 쑨원(앞줄 가운데)과 천치메이(앞줄 오른쪽).  사진 제공=김명호

천커푸는 장쑤(江蘇), 저장(浙江), 안후이(安徽) 3개성에서 4000여명을 모병했다. 상하이 군벌 루융샹(盧永祥·노영상)은 천커푸의 모병 공작을 방해했다. 예비 생도들은 광저우로 향하던 노상에서 루융샹의 부하들에게 끌려가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천신만고 끝에 상하이 부두에 도착해도 루융샹이 고용한 건달들이 눈알 부라리며 상선(上船)을 허락하지 않았다. 천커푸는 친분이 있던 상하이 경찰국 수뇌에게 하소연했다. ‘도로보수 노동자 상하이 사무소’ 간판을 내걸고 모병을 계속했다. 군의관과 박격포 제조 기술자도 천커푸의 설득으로 황푸군관학교 문턱을 넘었다.

장제스는 사람 욕심이 많았다. 미국에서 학업을 마친 천리푸가 탄광에 취직했다는 말을 듣자 편지를 보냈다. “광저우로 와라. 네가 할 일이 많다.” 천리푸는 정치나 군사 문제에 흥미가 없었다. 완곡히 거절했다. 장제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답장을 보내 설득했다. “지금은 혁명에 투신할 때다. 광산에서 도대체 뭘 캐겠단 말이냐. 나와 함께 혁명 광산을 채취하자.”

천리푸는 장제스의 성의에 감동했다. 광저우로 가는 형 천커푸를 따라 나섰다. 군관학교 교장실에 들어갔을 때 장제스는 누구를 야단치고 있었다. 가혹하기가 뭐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장제스는 천리푸에게 교장실 기요비서(機要秘書·중요 문건을 담당하는 정보비서에 해당) 임명장을 줬다. “네가 내 옆에 있게 되니 든든하다”며 싱글벙글 하더니 “너를 보니 잉스(英士, 천치메이의 자(字)) 생각이 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천치메이의 부인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나는 당연히 그러겠지만, 너도 홀몸이 된 숙모를 잘 모셔라. 너희 형제의 앞날은 내가 책임지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어서 잉스를 볼 면목이 없다.”

장제스의 배려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나를 친삼촌처럼 알아라. 한 집에 살며 밥도 같이 먹자. 요구 사항이 있으면 지금 말해라. 다 들어주마.” 천리푸는 마다하지 않았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저를 남 앞에서는 야단치지 마십시오. 저 혼자 있을 때는 어떤 심한 꾸지람을 하셔도 됩니다.” 장제스는 알았다며 또 훌쩍거렸다. “잉스는 무서운 사람이었지만, 내게는 한 번도 싫은 소리 한 적이 없다. 내가 잉스를 처음 만난 것도 지금 네 나이 때였다.” 1924년 가을, 천리푸 24세 때였다.

천씨 형제는 장제스를 위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1926년 1월, 국민당 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감찰위원에 선임된 천커푸는 천리푸와 함께 장제스의 당권 장악에 착수했다. 광둥성 중공 조직의 창시자 탄핑산(譚平山·담평산)의 수중에 있던 중앙당부(中央黨部)부터 손을 봤다. 중앙당부에 있던 중공 당원들을 한 명 한 명 믿을 만한 사람들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계속>

김명호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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