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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과 지나친 정부 지출은 화를 부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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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6호 18면

‘향후 50년, 한국 경제는 지난 50년보다 39% 덜 성장할 것이다.’


지난해 맥킨지 산하 경제 연구소인 맥킨지글로벌인스티튜트(MGI)는 한 보고서에서 이같이 전망했다. 이에 따르면 한국의 1964~2014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연평균 7.0%였고, 2014~2064년엔 이보다 39% 떨어진 연평균 4.3%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MGI는 향후 50년간 독일(-52%)·일본(-36%)·미국(-34%)·중국(-30%) 등의 주요국들도 지난 50년간 이룩했던 경제성장에 비해 성장세가 눈에 띄게 둔화될 것으로 분석했다.


저성장의 고착화를 뜻하는 ‘뉴 노멀(New Normal)’의 시대는 피할 수 없는 것일까. 국내외 내로라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런 가운데 최근 국내 한 경제학자가 정치·경영·문화인류학 등 다양한 분야 대표 저서들의 분석을 통해 경제성장 둔화에 대한 몇 가지 관점을 제시, 눈길을 끈다. 강임호 한양대 교수(경제학)는 지난달 29일 하나금융경영연구소가 발간한 ‘경제성장이 느려진 이유에 대한 세 가지 관점’ 보고서에서 경제성장 둔화 요인을 세 갈래로 분석했다(상단 표 참조).


대런 애쓰모글루 미 MIT 교수의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제러드 다이아몬드 미 UCLA 교수의 『총, 균, 쇠』, 피터 블레어 헨리 미 뉴욕대 스턴경영대학원장의 『턴어라운드』 등 3종의 저서가 인용됐다. 강 교수의 보고서와 책을 쓴 세계적 석학 3인의 주장을 ‘가상 대화’의 형식으로 엮어 경제성장 둔화의 요인과 해법을 짚어봤다.  

경제적 불평등 고착화되면 성장 정체 강임호 교수(사회자)=경제성장에서 국가별 편차가 생기는 이유가 뭘까. 때론 비슷한 상황에서도 차이가 발생한다.


다이아몬드 교수(제러드)=남한과 북한을 보자. 1950년대 두 나라는 똑같은 빈곤 국가였다. 되레 남한보다 자원 매장량이 많은 북한의 상황이 조금 더 좋았다. 지금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애쓰모글루 교수(대런)=경제성장엔 ‘포용적 정치제도’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당시 한국처럼 가난했던 나라로 필리핀이 있다. 필리핀은 한국보다 자원이 풍부해 당대 학자들이 “한국이 계속 가난하더라도 필리핀은 다를 것”이라고 했다.


제러드=한국은 인적 자원에서 필리핀보다 큰 잠재력이 있었다. 물적 자원만 감안했기에 분석에 오류가 생긴 것이다.


대런=그것도 맞지만 필리핀은 부(富)를 독차지한 기득권층이 정치제도를 멋대로 좌지우지해, 경제적 불평등이 고착화하는 악순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965~86년 장기 집권했던 고(故)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 시절 독재와 부정부패가 일상화하면서 성장에 걸림돌이 됐다.


헨리 원장(피터)=그 21년간 필리핀의 GDP 성장률은 동남아 주요 5개국(태국·말레이시아·필리핀·베트남·인도네시아) 평균치에도 못 미쳤다. ‘마르코스의 닮은꼴’이라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신임 대통령은 어떤 모습을 보일지 관심사다.


사회자=한국에도 독재 정치가 있지 않았나.


대런=한국은 박정희 정권 때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지도자가 ‘할 수 있다’는 의지를 갖고 ‘새마을운동’ 등 국민 역량을 하나로 모으는 리더십을 적기에 펼친 결과다. 이는 인정해야 한다. 다만 독재가 더 오래 지속됐다면 오늘날의 한국이 되긴 힘들었을 것이다. 1987년 정치적 민주화가 지속 가능한 포용적 경제제도를 갖추도록 이끌었다. 국가 주도의 산업정책으론 장기 성장을 도모할 수 없다. 기업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해야 한다. 특정한 힘의 논리에 휘둘려서는 실패한다.


결국 문제는 정치다. 왜 이집트는 영국보다 가난할까. 역사적으로 훨씬 오래전부터 번영했는데도 말이다. 영국(정확히는 잉글랜드)은 1688년 ‘명예혁명’으로 입헌군주제 대신 의회민주주의를 택하면서 정치를 뒤바꿨다. 이는 18세기 산업혁명의 토양이 됐다. 경제가 발전하려면 사회가 가진 모든 인적·물적 잠재력이 발휘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야 한다. 그걸 가능케 하는 게 다양한 집단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포용적 정치’다.


인구도 중요한 요인 … 고령화는 생각보다 심각


제러드=포용적 정치가 매번 경제성장이란 선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인가.


대런=쉽지 않지만 일단 뿌리를 내리면 선순환 고리를 형성하는 경향이 있어, 성장의 밑바탕이 될 만한 제도가 더 오래가고 확대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여지가 크다. 다원주의 정치의 논리는 독재자나 정부 내 파벌, 심지어 선의의 대통령이라 해도 권력 찬탈을 한층 어렵게 만든다. 다원주의엔 법이 만인에게 평등하게 적용돼야 한다는 법치주의 이념이 깃들어 있는데, 이는 한층 폭넓은 정치 참여와 더 큰 포용성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포용적 정치와 포용적 경제제도는 서로 의지하며 확대되는 양상을 띠게 된다. 이를 통해 또 다른 선순환이 일어난다. 노예제와 농노제 같은 착취 제도가 뿌리 뽑히고, 독점의 실효성이 퇴색되며, 역동적인 경제가 창출된다. 18세기 영국에선 이미 포용적인 경제제도가 뿌리를 내렸기에 기득권층이 민주주의 확대에 탄압으로 맞설 수 없었다.


사회자=오늘날 각국 정부와 의회가 정신 차리고 올바른 정치에 힘써야만, 피하기 힘든 저성장 추세에서 오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들린다. 특히 민의(民意)에 대한 귀를 열어둬야겠다. 정쟁을 위해 자기 목소리만 내기 바쁜 한국의 정치권이 새겨들어야 할 얘기다.


제러드=그런데 경제성장에 있어 특정 민족만이 우월한 역량을 지녔다는 식으로 논리가 비약돼선 안 된다. 예컨대 단순히 국민이 더 근면했기에 경제가 더 성장했다고 보긴 어렵다는 것이다. 기후·지리적으로 모든 국가가 성장하기 좋은 환경을 가진 것은 아니다. 같은 미국 내에서도 온대지역인 북동부의 뉴욕주와 오하이오주는 열대지역에 가까운 남동부의 미시시피주 등보다 훨씬 부유하다. 전자가 후자보다 농업 생산성이 높고 공중보건 환경이 나아서 대대로 영향을 미친 것이다.


피터=저서로 읽었다. 특정 인종·민족이 우월하다는 인종주의자들의 헛된 주장을 통쾌하게 반박했다.


제러드=덧붙이자면, 경제성장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인구 규모다. 과거 호주는 광활한 영토와 풍부한 자원을 갖추고, 외침 같은 성장의 걸림돌이 거의 없었음에도 왜 부강한 사회가 되지 못했을까. 건조하고 척박하며 종잡을 수 없는 기후 때문에 수렵과 채집 인구가 수십만 명 수준을 넘지 못해서였다.


고대 중국이나 중미의 수천만 인구와 비교했을 때 그만큼 잠재적인 발명가의 수가 훨씬 적었다는 뜻이다. 또 새로운 발명품을 받아들여 실험하려 나서는 집단의 수가 훨씬 적었다는 뜻이다. 적은 인구로 고립되면서 경제성장의 동력이라 할 기술 수준이 좀체 발전하지 못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고령화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데, 경제성장엔 빨간불이 켜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사회자=실제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 중인 국가는 경제성장에 불리하다. 성장 동력을 잃어서다. 일본이 그렇고, 한국도 위기다. 이렇게 고령화로 성장이 둔화되는 것을 경기순환의 문제로 착각해 정부가 지출을 막대하게 늘린다면 저성장 늪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 성장 둔화 요인을 고령화로 단정 지으면 정치가들은 싫어할 것이다. ‘대책 없이 손 놓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서다. 그 해법으로 재정 지출을 늘리는 건 비교적 쉬운 일이라 유혹이 있을 수밖에 없다.


무상 정책으로 무너진 남미의 현실 직시해야


피터=그래서 강조하고픈 게 ‘규율(disci pline)’이다. 사실 모든 경제성장에서 위기가 수반되는 건 필연적이다. 카리브해의 섬나라 바베이도스와 자메이카는 정치제도나 기후·지리적 환경 모두 비슷했다. 차이를 가른 건 규율의 유무였다. 바베이도스는 경제위기 때 각 경제주체들이 손해를 분담하는 식으로 맞섰다. 자메이카는 정부 지출을 늘려서 누구도 손해를 보지 않는 식으로 대응했다. 그 결과 전자는 다시 성장했고, 후자는 도태됐다.


대런=바베이도스는 1990년대 초 불경기와 관광객 감소, 사탕수수 생산 부진이 겹쳐 고전하다가 이후 다시 성장세로 전환했다. 2014년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이 바베이도스는 1만5373달러로 러시아보다 높았고, 자메이카는 5133달러로 그 3분의 1 수준이었다.


사회자=바베이도스가 강소국이긴 해도 선진국에 비할 바는 아닌데, 이런 신흥국들한테서 선진국이 배워야 할 점도 있다는 뜻인가.


피터=물론이다. 당연히 내가 강조하는 규율은 혹독한 재정 긴축을 뜻하는 게 아니다. 경기가 좋을 땐 긴축만을 하고, 좋지 않을 땐 부양을 하자는 것이다. 중국의 경우 이 같은 ‘유연한 규율’을 상황에 따라 잘 만들고 유지하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신흥국이었지만 지금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주요 2개국(G2) 반열에 오른 원동력이다. 성장이 둔화된 선진국들은 신흥국이 지난 수십 년간의 빠른 성장 과정에서 보여준 규율과 절제의 미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사회자=한국도 그런 신흥국의 하나였다. 아울러 IMF 외환위기 극복이라는 전례가 있다. 과감한 구조조정이 위기 극복을 이끌었다. 이것도 일종의 규율 아닌가. 경제주체들이 손해를 분담하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피터=두말할 것 없이 규율이 잘 적용된 좋은 사례다. 한국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저성장 문제에 처할 것이고, 매순간 ‘손해를 분담하면서 미래를 기약하느냐, 눈앞의 손해를 보지 않는 데 집중하느냐’ 선택의 기로에 놓일 것이다. 판단은 한국인들에게 맡기겠지만, 위기를 극복하려면 상황별로 알맞게 규율의 적용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사회자=IMF 사태 때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손해 분담 대신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으로 극복하려 했다면 결과가 어땠을지 궁금하다. 자메이카처럼 됐을까.


피터=속단은 어렵지만 자메이카까지는 아니어도 재도약에 어려움을 겪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한때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포퓰리즘 정책이 요즘 크게 흔들리고 있다. 한국 진보 일각에서 한때 ‘롤모델’로 여겼던 남미가 대표적이다. 자원 부국 베네수엘라는 재정을 무상교육 등에 탕진했다가 국제 유가 하락의 직격탄을 맞았다. 브라질도 지난해 GDP 성장률이 25년 만에 최저치(-3.8%)를 기록하면서 최근 좌파 성향의 지우마 호세프 전 대통령이 탄핵됐다.


사회자=잘나갈 때 ‘나무(눈앞)’만 보고 ‘숲(미래)’은 보지 못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대런=포퓰리즘의 맹점은 기득권층이 ‘자신을 위하는 정책’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각종 정책들이 수정되면서 기득권층의 이익을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말이다. 냉철히 봐야 한다.


사회자=세 분 모두 오늘 말씀 감사 드린다. 세 관점 모두 유용하지만, 한국에선 특히 규율의 적용이 중요하겠다는 말로 오늘 논의의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제러드=다음을 또 기약해보자. 저성장과 아울러 세계를 위협하는 국가 간 불평등의 심화 문제도 하루빨리 극복됐으면 좋겠다.


강임호 교수(사회자)=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 UC샌디에이고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연구위원 등을 역임했다.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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