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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 외면한 고집불통 브라질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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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채인택
채인택 기자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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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논설위원

지난달 31일 탄핵당한 지우마 호세프(68) 브라질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마지막 변론에서 보여 준 것은 좌파 원칙주의자의 ‘신앙 고백’과 다름없었다. “과거 20년간 독재에 맞서 싸웠다. 내 몸엔 당시 고문의 흔적이 남아 있다” “군부 독재 시절 고문으로 겪었던 죽음의 공포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쿠데타로 인한 민주주의의 죽음이 더 무섭다” “경제 기득권이 아닌 민주주의를 위해 투표해 달라” “일흔 가까이 됐고 엄마와 할머니가 됐지만 평생 나를 이끌었던 신념을 버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등등 격정적인 발언이 이어졌다.

이틀 뒤인 지난달 31일 브라질 상원은 전체 의원 81명 중 찬성 61표에 반대 20표로 탄핵을 결정했다. 탄핵에는 전체의 3분의 2(54표) 이상이 필요하니 몇 명만 잘 설득했으면 위기에서 탈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호세프는 과거 업적과 원칙·신념을 내세우는 걸로 대신했다. 그런 그에게 의회는 물론 국민도 등을 돌렸다. 10명 중 한 명만 지지했다.

2011년 1월 여성으로선 처음 브라질 대통령에 오른 호세프는 이로써 5년8개월 만에 탄핵이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2003년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71) 전 대통령 이후 지속됐던 브라질노동자당(PT)의 좌파 정권도 13년 만에 끝났다. 그 과정을 살피는 것은 흥미롭다. 기대를 모았던 정권이나 지도자가 어떻게 몰락하는지를 잘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는 결코 ‘먼 나라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호세프 탄핵의 주 혐의는 정부회계법 위반이었지만 이는 명분일 뿐이다. 실제로는 경제적·도덕적·정치적 위기라는 ‘리더십 삼재’가 원인으로 분석된다. 경제 성적표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브라질 경제는 그가 재선한 2014년 이후 계속 악화일로다.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3.8%다. 1990년 이후 25년 만의 최악이다. 올해도 -3.3%다. 연속 뒷걸음질이다. 9%대의 인플레이션에 11%의 실업률에 실망하지 않을 국민은 없다. 아무리 세계적 불황이라 해도 이 정도면 무능이다. 텅 빈 호주머니는 총구보다 정치적으로 더 위험하게 마련이다.

부패는 호세프 정권을 도덕적 마비 상태로 몰았다. 집권 노동자당은 물론 연정 파트너인 브라질민주운동당(PMDB)의 주요 정치인들이 기소됐다. 국영석유회사 페트로브라스에서 뇌물을 챙긴 혐의다. 여론은 들끓었다. 좌파 정권의 생명이라던 도덕성은 땅에 떨어졌다. 무능에 부패까지 더하니 호세프는 식물 대통령이 됐다.

심지어 룰라 전 대통령도 수사를 받게 됐다. 여기서 호세프는 정치적 위기를 자초했다. 정치적 후견인인 룰라를 구하려고 그를 수석장관에 앉히려 했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었다. 호세프만 그런 목소리에 귀를 막았다. ‘방탄 공직 임명 시도’라는 꼼수는 역풍을 불렀다. 여론이 등 돌린 결정적 계기가 됐다. 호세프의 정치적 리더십은 룰라와 동시에 무너졌다. 50%를 넘던 지지율은 찰나의 순간에 10%대로 추락했다. 우파가 집결해 탄핵에 박차를 가하지 않았어도 호세프 권력은 이미 지속이 불가능했다.

또 다른 문제는 리더십 스타일이다. 호세프는 전임 룰라와 달리 타협과 협상 대신 원칙과 고집으로 일관했다는 평이다. 룰라는 좌파는 물론 중도 우파까지 끌어안았다. 덕분에 넓고 탄탄한 연립정권을 유지했다. 반면 호세프는 고집스럽게 원칙을 내세워 정치 영역을 스스로 좁혔다는 평이다. 그는 세계적 유행인 ‘불평등’ 문제에 집착했다. 룰라 이래 정권의 핵심이던 ‘분배와 성장의 조화’ 대신 분배로 무게추를 옮겼다. 이 때문에 사이가 틀어진 중도 우파 PMDB는 지난 3월 말 연정에서 탈퇴했다. 이번에 탄핵을 주도하고 호세프의 남은 임기 동안 대통령직을 맡게 된 미셰우 테메르(75)가 이끄는 정당이다.

호세프의 탄핵은 지도자가 원칙과 신념만으론 나라를 이끌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주변 사람 관리도 철저하게 해야 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과도 대화하면서 공존을 모색해야 하다. 지도자의 정치력은 경청·대화·타협으로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호세프의 교훈을 먼 나라 이야기로만 여겨서는 우리 미래도 어두울 수 있다.

채 인 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