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바루기] 칠색 팔색을 하면 몰라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8면

알랭 드 보통은 자신의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을 통해 통굽 구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낸 바 있다. 통굽 구두뿐 아니라 여자들에겐 사랑받는 패션 품목인 레깅스, 어그부츠, 호피 무늬 옷 등에 대해서도 질색하는 남자가 많다.

‘질색하다’는 몹시 싫어하거나 꺼리다는 의미다. 이보다 훨씬 더 심할 때 ‘질색 팔색(을) 하다’는 표현을 즐겨 쓴다. “여자들은 군대 얘기라면 질색 팔색을 하지!” “샌들에 양말을 신고 반바지 차림으로 나갔더니 여자 친구가 질색 팔색을 하더라고!”와 같은 경우다. ‘질색하다’에 이끌려 ‘질색 팔색(을) 하다’고 표현할 때가 많지만 ‘질색 팔색’을 ‘칠색 팔색’으로 바루어야 한다. ‘칠색’과 ‘팔색’은 한 단어가 아니므로 붙여 쓰면 안 된다.

현실 언어를 반영해 ‘질색 팔색’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표준국어대사전엔 ‘매우 질색을 하다’의 관용 표현으로 ‘칠색 팔색(을) 하다’만 올려놨다. ‘칠색’은 빨강·주황·노랑·초록·파랑·남빛·보라의 일곱 빛깔을 가리킨다. ‘팔색’은 사전에 별도의 표제어는 없으나 ‘칠색’과 연관 지을 때 여덟 빛깔을 이른다고 볼 수 있다. 안색이 일곱 가지, 여덟 가지 빛으로 변할 만큼 매우 질색하는 것을 ‘칠색 팔색(을) 하다’로 표현한 셈이다.

‘질색하다’의 영향 때문에 잘못 사용하는 말로는 ‘아연질색하다’도 있다. “거지꼴을 하고 나타난 그를 보고 모두 아연질색했다”처럼 쓰면 안 된다. 뜻밖의 일에 얼굴빛이 변할 정도로 놀라다는 말은 ‘아연실색(啞然失色)하다’이다. ‘대경질색하다’ ‘경악질색하다’ 역시 ‘대경실색하다’ ‘경악실색하다’가 바른 표현이다.

이은희 기자 eunhe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