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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서울대담당 정보과형사 「차박사」퇴임|"요즈음 학생운동 낭만이 없어졌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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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서울대 「차박사」-. 정작 학위를 받은 일도 없고 교수도 아니다. 그런데도 누구나 「박사」라고 부른다.
4·19 다음날부터 꼬박 26년하고 2개월을 서울대담당 경찰서 정보과 형사로 일해온 차익수경감 (58).
서울대와 서울대를 본산으로 하는 학생운동에 관한한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깊이 피부로 아는 「서울대 차박사」가 26일 정년퇴임, 37년간의 경찰관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대를 떠났다.
『가장 아쉬운것은 20여년간 모아왔던 학생운동 관련 유인물을 몇해전 금호동 이 집으로 이사하면서 분실한 것입니다. 학생운동사의 귀중한 자료일 뿐 아니라 내게는 반평생의 발자취인데.』
차박사가 보관하고 있는 몇 안되는 자료중 가장 오래된 것은 60년11월2일의 「서울대민족통일연맹 (민통)발기문」.
정치학과 3학년생들이 주축. 남북학생회담 개최등 주장까지 내세우고 나섰을때 5·16이 났다. 용공단체로 규정돼 간부들이 대거 구속되는 수난을 당했다.
집행위원장 윤모씨(교수), 홍보부장 이모씨(언론사중역), 대의원 황모씨(언론사 사장)등이 모두 그때 구속됐던 민통의 간부들.
4·19직후 술렁이는 분위기속에서 구성된 또 하나의 단체는 민정당 안모의원이 중심이 된 「새생활 계몽대」.
다방의 일본가요 레코드판과 거리의 일본식이름 간판을 부수는 등 사회기풍쇄신에 앞장섰다.
계몽대는 나중 「향토개척단」으로 이름을 바꿔 농촌봉사활동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요즘 학생들의 「농활」의 시초라고 볼수 있다는 것이 차박사의 설명이다.
일손부족에 시달리던 농촌에서는 처음에는 학생들을 대환영했으나 나중에는 농부들이 학교에 찾아와 『시골처녀들이 바람나기 쉽다』며 오지말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뒷 얘기다.
6·3사태 (64년) 때 농대생 5백여명이 수원에서 올라와 동숭동문리대 캠퍼스서 단식농성을 벌였다.
6월3일하오10시 계엄령이 선포된다는 것을 미리 안「차박사」는 학생들을 설득,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10분후 무장군인들이 학교에 들이 닥쳤다.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고 차박사는 회고했다.
김지하시인의 『탄아 탄아 최루탄아 8군으로 돌아가라』의 『최루탄가』가 나온것도 이때. 대학가 「반체제가요」의 효시격이라는 풀이다.
당시의 학생운동 리더들인 현모씨 (현K대교수)·김모씨(재야정치인)·한모씨 (현서울대교수) 등도 예외없이 수배, 구속의 시련을 치렀으나 모두 사회에 복귀. 그 무렵 64년5월 모일간지에 「데모현장에서 만난 수도경비사령관과 학생대표」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그런데 학생대표는 차박사가 모르는 얼굴. 수소문 해본 결과 학교주변을 배회하던 건달 청년으로 차박사는 밝혀냈다.
이 가짜학생은 수년뒤 부잣집 고명딸을 속여 결혼하려다 들통나기까지 했다.
가짜학생은 지금도 서울대의 골칫거리. 경찰과 학생이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 것은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 75년5월부터.
이때부터는 『시위가 벌어지면 돌과 최루탄이 난무하고 경찰이 학내에 상주하게 됐다』 고 차박사는 회고했다.
이전까지 경찰은 학생들이 교문밖으로 나오는 것을 몸싸움으로 저지했으며 어쩌다 최루탄을 사용한 뒤엔 다음날 소방차를 동원, 문리대앞의 마로니에 나무와 건물벽을 씻어 주기까지 했다고 말한다.
역대총장중 차박사와 가장 인연이 깊은 사람은 9대 유기천총장.
취임후 계속된 한일협정비준반대 데모로 신변에 위험을 느낀다며 소지허가를 신청, 화제가됐던 유총장의 쌍권총은 차박사가 넘겨 받아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벨기에제 브로닝 6연발권총.
차경감의「박사호칭도 유총장이 붙여준 것. 어느날 보직교수들을 공관에 초청한 자리에서 『총장이 수여하는 학위기』라며 양주를 맥주잔에 따라준 뒤 「박사」호칭이 널리 쓰이게 됐다.
사람마다 「박사」로 부르는 바람에 동숭동시절 자주 드나들던 「대학다방」의 마담은 차박사를 진짜 교수로 여기고 만날 때마다 경찰을 비난하다 뒤늦게 경찰임을 알고는 사과술을 한턱 톡톡히 내기도 했단다.
26년동안 차박사가 인연을 맺은 서울대생은 수천명. 지금은 국회의원·장관공무원·교수·재야인사 등 각계의 기라성같은 인재들이지만 『살아있는 사람의 얘기, 공무원이 직무수행중 취득한 비밀은 퇴임후에도 밝힐 수 없다』 며 입을 다문다. 그래서 「회고록」을 출판하라는 주위의 권고도 일축했다.
46년 웅진고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황해도연백에서 월남, 경찰에 투신한 차순경은 37년간 경찰에 봉직하면서 외곬으로 정보만 했다. 2남4녀중 두 딸을 시집보내고 2남2녀와 금호동의 대지 30평에 건평 23평짜리 집에 산다. 자녀들은 대학을 마쳤고 막내딸만 대학3년 재학중. 자녀들은 『경찰이나 서울대와는 인연이 없다』고 웃는다.
『70년대초까지만 해도 학생운동에는 낭만이 있었어요. 72년「유신」이 나고 75년 긴급조치9호가 발동되면서 분위기가 삭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엔 데모주동학생들과 어울려 막걸리도 마시고 입장은 달라도 서로 위로(?)도 하곤 했는데. 이제는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 얘기지요.』
퇴직금 대신 월40만원 연금을 받기로 했다. 7월1일부터 교통안전협회 과장으로 제2인생을 시작한다. 『학생들의 주장은 대개 10년쯤 후면 현실로 돼요. 그러나 감옥에 갔다는 것이 경력이 되는 사회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학원담당26년 정보형사의 결론이었다.<김두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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