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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포트리스(The Fortress) #5. 드라이브 (2)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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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준 것이 실수였다. 놈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생각이었던 것이다.
원진은 민첩한 동작으로 후진기어를 넣고 전속력으로 밟았다.

놈이 미쳐 총을 쏘기도 전에 원진의 차에 받히며 내동댕이쳐졌다. 하지만 원진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놈이 쓰러진 방향으로 운전대를 돌려 놈의 머리를 밟고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또 한 번.

원진은 운전석에 앉은 채 사이드미러로 쓰러져 있는 놈의 동태를 살폈다. 움직임이 없던 놈의 다리가 꿈틀거리자 원진은 한숨을 내쉬며 차에서 내렸다. 놈에게 다가간 원진은 그의 다리를 툭 건드렸다. 그러자 또다시 꿈틀거렸다. 얼굴 상태로 보아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시간은 없었다. 갑자기 생긴 귀찮은 일에 짜증이 났지만 이미 벌어졌으니 수습할 수밖에.

잠시 망설이던 원진은 주변을 한 번 둘러 본 후에 놈의 벨트에 꽂혀있던 대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놈의 목에 깊숙하게 찔러 넣었다. 발이 잠깐 경련을 일으키고는 움직임을 멈추고 나서야 대검을 뽑아냈다. 그리고 골목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계엄군은 통상 3인 1조로 다녔기에, 경험상 하나를 죽였으면 나머지 두 명도 죽여야 뒤탈이 없었기 때문이다.

원진은 대검을 들고 골목 안으로 향했다. 안쪽으로 들어서자 인기척과 더불어 거친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한 놈은 소녀 위에 엎어져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뒤에 서서 그걸 지켜보며 자신의 사타구니를 주무르고 있었다.

원진은 당연히 일에 열중하는 놈보다 뒤에 서 있는 놈을 먼저 선택했다.
조용히 다가선 원진은 놈의 등을 향해 대검을 올려 찔렀다. 칼날은 순식간에 피부와 근육을 지나 폐를 찢었다. 뒤에서 폐를 찔린 놈은 공기가 빠져나가 비명을 지를 수가 없었다. 깜짝 놀란 놈의 목을 뒤에서 감싼 원진은 대검을 뽑아 목을 찔러 목숨을 거두었다.

시체를 옆으로 질질 끌고 가는 동안에도 소녀 위에 있던 놈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엄청난 집중력이었다. 원진은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놈의 동작을 시선으로 따라잡으며 찌를 곳을 노렸지만 너무 격렬하게 움직여서 도무지 타이밍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원진이 그를 불렀다.

“어이.”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놈이 소스라치게 놀라 멈칫했고 원진은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놈의 목에 칼을 꽂았다.

그렇게 계엄군 세 명을 모두를 죽인 원진은 골목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고 판단한 원진은 시체들을 골목길 이곳저곳에 널어놓았다. 그리고 곧장 자신의 차로 돌아가 차 뒤에 쓰러져 있는 계엄군 시체와 트렁크에 있는 시체들까지 차례로 골목 안쪽으로 옮겼다.

공권력이 동네 골목길에서 시민을 강간하는 이런 무법 시대엔 과학수사고 뭐고 없었다. 현장의 모습으로 판단하는 게 전부였다. 원진은 경험을 동원해 시체들을 골목길 이곳저곳에 배치하고는 인테리어를 상태를 확인하듯 약간 거리를 두고 상태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계엄군과 시민군이 편을 갈라 격렬히 싸우다 양쪽 모두 죽은 것처럼 보였다. 감전사한 시체만 빼고.

“쯧.”

원진은 감전사한 시체는 다시 차에 실었다. 그리고 대검 손잡이를 닦아 계엄군 시체 손에 쥐여주었다.

원진이 마지막으로 한 일은 소녀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었다. 소녀는 개머리판으로 맞은 듯 광대뼈가 골절되어 주저앉아 있었고 머리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 터진 입술로 금붕어처럼 뻐끔거렸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의식은 아직 있어 보였다.
거의 감긴 눈이긴 했지만 소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원진은 시체의 손에 쥐여주었던 대검을 다시 가져왔다. 목격자가 있어서도 안 되었지만 길어야 몇 분인 목숨을 미리 끊어 고통을 덜어주는 게 나아 보였기 때문이다.

소녀의 목뒤로 칼을 넣어 단숨에 그녀의 목숨을 끊은 원진은 대검을 다시 원상태로 해놓고 차로 향했다. 원진은 갑자기 일어난 일을 임기응변으로 대응해서 시체까지 한꺼번에 처리한 것이 만족스러웠다. 이 정도면 힘들이지 않고 시체를 처리한 것이니 나쁘지 않은 일처리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감전사 한 놈이었다. 피와 진물이 계속 흘러나오는 놈은 어디에 둬도 자연스럽지 않았다.

“아, 거기.”

마땅한 곳을 떠올린 원진은 차를 몰고 가면서도 진물을 흘리고 있는 시체 유기에 어울릴만한 장소 찾아봤지만 가까운 곳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경기도로 넘어가기 직전에 있는 동네 야산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전국 행정구역 경계에는 상시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경기도가 가까운 이곳도 다르지 않았지만, 이곳에서만 12년을 산 원진은 지름길을 통해 어렵지 않게 검문소를 피할 수 있었다.

야산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엔진을 끄고 한동안 귀를 기울였다. 엔진 열기가 식으며 차체가 내는 틱틱 거리는 소리 외에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야 차에서 내린 원진은 주변을 경계하며 트렁크에서 시체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야산 옆 송전탑으로 끌고 갔다.

송전탑이 제 기능을 할 때만 해도 계엄군의 순찰 코스 중에 하나였지만, 시민군이 송전소를 공격해 전기가 끊어진 후엔 단순한 생긴 철골 구조물일 뿐이었다.

원진은 송전탑 아래 도착하자마자 시체를 감싸고 있는 비닐을 벗겨냈다. 피와 진물로 얼룩진 비닐을 둘둘 말아 수풀 뒤로 던져 버리고 시체의 상태를 지켜보았다. 전기가 끊어졌어도 최소한 감전사한 시체와의 개연성은 있었기에 이 정도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과학수사 따위는 개나 줘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그때 송전탑 건너편에서 언뜻언뜻 불빛이 보였다. 흔들리는 플래시 불빛이었다. 계엄군일 확률이 높았다. 원진은 입술을 깨물며 수풀 사이로 몸을 숨겼다. 더 이상 순찰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모양이었다. 3명이 한 조이기에 세 개여야 할 플래시 불빛이 두 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지자 원진은 걱정되기 시작했다. 시체도 시체지만 아래쪽에 세워둔 차를 놈들이 발견하면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넌 몇 개월 남기고 말뚝 됐냐?”

“육 개월입니다.”

“나보단 낫네. 난 두 달 남기고 전역 취소됐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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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은 송전탑 앞에 이르자 자연스럽게 담배를 꺼내 들었다. 팔뚝에 육각형 모양의 마크를 단 병사가 담배를 흔들어 보이며, 삼각형 마크를 단 병사에게 말했다.

“이거라도 계속 주니까 버티지, 아니면 진작 탈영했다.”

몰래 엿듣던 원진도 병사의 말에 공감을 했다. 생산이 중단된 담배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계엄령 선포 직전에는 담배 한 개비를 빼앗기 위해 발생한 살인사건이 급증했었다. 그렇기에 원진은 비흡연자인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삼각형 마크를 단 병사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시민군 놈들도 놈들이지만, 부작용자들 때문에 힘들어 죽겠습니다. 왜 그렇게 힘이 센 겁니까?”

계엄군은 신약 부작용으로 변해버린 자들을 ‘부작용자(副作用者)’라 불렀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는 말을 참 잘 지어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각형 마크의 병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미쳤으니까.”

“아니, 미친다고 힘이 세져요?”

“부작용자 대응 교육 안 들었냐?”

“당연히 들었죠. 그런데 힘 세진다는 얘긴 없었는데.”

육각형 마크를 단 병사가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잘 들어. 일반인은 신체를 보호하는 방어기재가 무의식에 깔려있어. 그게 무슨 말이냐면, 주먹질을 해도 근육이나 뼈가 다치지 않는 수준까지만 힘을 내는 거지. 그런데 부작용자들은 그게 없는 거야.”

삼각형 마크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아, 그러니까 근육이 망가지든 말든, 연골이 부서지든 말든 최대한의 힘으로 풀 스윙을 하는 거군요?”

“그렇지. 그래서 맨손으로는 세 명이 달라붙어도 제압하기 힘든 거야.”

“아, 젠장. 이 짓을 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건지…. 그런데 치료제 개발이 아직 안 된 겁니까?”

“그렇다고들 하데?”

“그럼 우리가 먹는 건 뭡니까? 설마 만만한 군바리한테 또 임상 실험하는 겁니까?”
육각형 마크의 병사가 주변을 힐끗 보고는 대답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개발은 됐는데 일반인한테는 안 풀고 있다더라고.”

“안 풀어요? 왜요?”

“높은 놈들 속을 어떻게 알아.”

육각형 마크는 담배를 비벼 끄고는 말을 이었다.

“슬슬 가자. 중대장 지랄할라.”

무의식중에 원진 쪽으로 고개를 돌린 병사가 우뚝 멈추더니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왜 그러십니까?”

삼각형 마크가 물었지만 그는 대꾸도 하지 않고 계속 주시하더니 아예 이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본 원진은 본능적으로 허리춤으로 손을 뻗다가 대검을 골목길에 놓고 왔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긴장했다. 원진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앞쪽에 있는 시체를 바라보았다. 놈들은 원진을 발견하기 전에 시체부터 발견할 것이고 그렇다면 더욱 경계심을 가지고 부대원들을 불러 이 일대를 전부 뒤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두워서 정확하게 확인하기는 어려웠지만 병사는 시체와 원진, 둘 중 하나를 발견하고 다가오는 게 분명했다. 놈의 플래시가 시체 주변을 더듬고 있을 때 멀리서 큰 소리가 들렸다.

“집합! 집합!”

동료 병사의 호출에 놈은 우뚝 멈췄다. 잠시 갈등하는 표정으로 서 있다가 입맛을 다시며 발길을 돌렸다.

“왜 그러십니까?”
뒤따라오던 삼각형 마크를 한 병사의 질문에 놈은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잘못 봤나 봐.”

그들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원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차를 향해 서둘러 내려가면서 계엄군들의 대화를 떠올렸다.

‘개발은 됐는데 일반인한테는 안 풀고 있다더라고.’

그 말에 따르면 신약 부작용을 치료할 치료제는 개발이 됐는데 일부러 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차를 끌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과연 정부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지 생각해 봤지만 알 수가 없었다. 정치 같은 복잡한 일에는 관심이 없던 터라 원진의 궁금증은 금세 사라졌다.

원진은 자신이 지나왔던 골목길로 들어섰다. 자신이 세팅한 대로 시체들이 그대로 있을지, 아니면 계엄군이 치웠을지 궁금했다.

통행금지 시간이 목전으로 다가왔지만 원진은 골목 앞에서 속도를 줄여 천천히 지났다. 골목길 안쪽으로 원진이 꾸며놓은 대로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는 게 보였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지나던 원진은 불현 듯 브레이크를 밟았다. 뭔가 풍경이 이상했다. 뭐가 빠진 건지는 모르지만 분명 원진이 처음 해 놓았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통금시간이 코앞이라 잠시 갈등했지만 이대로 지나치면 잠이 안 올 것 같았다.

원진은 차에서 내려 골목길 안쪽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일일이 시체들을 세어보았다. 틀림없이 여섯 구가 맞았다. 도대체 뭐가 잘 못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존재감이 없어서 잊고 있었던 소녀의 시체가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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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중앙대학교 졸업. IT 회사 입사, 경영기획, 전략기획, 사업제휴 등의 다양한 직무 경험.
1999년 포털사이트에 <왼팔> 연재. 2001년 출간. 이후 소시오패스를 전면에 내세운 액션 스릴러 <Business is business>(2010), <유령 리스트>(2015)로 액션물 출간.

2001.08 「왼팔」
2003.03 「왼팔II」
2005.07 「적경」
2008.06 「피해의 방정식」 (한국 스릴러문학단편선)
2010.01 「위험한 오해」 (한국 스릴러문학단편선II)
2010.10 「Business is business」
2013.11 「사이비」 (원작 : 연상호)
2014.03 「조난자들」 (원작 : 노영석)
2015.08 「유령 리스트」
2015.10 「살인의 기원」 2015 부산영화제 북투 필름 피칭작 선정
2016.04 「왼팔 rebuild」
2016.04 「블랙러시안」, 「증오」, 「복수의 미학」 (맨 헌터 태성 시리즈)
2016.05 「십이 죄」
2016.07 「세일즈 플래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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