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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북괴탱크는 막을 수 있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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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950년 6월 25일 새벽, 포천전선.
새벽3시40분, 어둠을 찢는 포성과 함께 38선 최전방국군경계초소는 탱크를 앞세운 적 대부대 기습점령당했다. 급보를 받고 양문리 공고개에 황급히 방어선을 쳤던 국군7사단 9연대 2대대 7중대(중대장 송영환 중위)는 30분만에 적3사단 7연대(연대장 김창? 대좌)선봉부대의 공격에 무너졌다.
진지 앞 5백m에 전진배치시켰던 대전차특공대가 전차격파에 실패한 뒤 어둠 속을 덮쳐드는 쇳덩이 괴물 탱크의 모습에 사병들은 혼비백산해 손쓸 새도 없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같은 시간 포연에 휩싸인 38선 전역의 모든 전방기지들도 인민군탱크가 대전차포를 퉁겨내며 밀려온다는 비명 속에 무너져갔다. 전차공포증.
비극의 전쟁 6·25에서 돌이켜보면 희극과도 같은 전차공포증이 거의 모든 전선에서 이처럼 국군의 저항의지를 꺾어버렸다.
사흘만에 서울을 내주고 낙동강까지 밀려야했던 개전 초기 국군패퇴의 가장 큰 요인의 하나가전군의 사병은 물론 지휘부까지 사로잡은 「전차공포증」이었다.
과연 적의 탱크는 그처럼「무적」의 병기였던가.
관계자나 전문가들은 한결같이『아니』라고 말한다.
『교육훈련 부족과 지휘관의 능력부족으로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다. 예컨대 국군이 갖고 있던 대전차포는 50m이내 근접거리에서 탱크의 캐터필러를 때리면 파괴할 수 있었으나 겁이 나 원거리 사격을 하다가 효과가 없자 공포증에 휘말리는 악순환을 거듭하게 됐다.』 예비역소장 장맹권 장군(63·당시수도사단 18연대 2대 대장)의 회고.
장장군은 지휘관들의 전투경험부족으로 탱크 전진을 저지할 수 있는 장애물설치·교량폭파 등 적절한 대응도 거의 하지 못해 적의 탱크가 무인지경 휩쓸듯 할 수 있었다고 돌이켰다.
6·25당시 적이 몰고 온 전차는 소제 T-34. 소련이 2차 대전 때 쓰던 것으로 76형(40년 제작), 85형(45년 제작)의 두 가지였다. 보유 대수는 2백40여대.
탱크가 「지상전의 왕자」일수 있는 것은 그러나 보·포병과의 유기적인 합동작전 때 탱크만의 단독작전이란 난센스다. 그런데도 북한공산군은 난간협곡에 하천과 교량이 많은 좁은 도로를 일렬종대로 늘어선 채 돌진하는 무모한 작전을 전개했다. 선두탱크의 기동이 정지되기라도 하면 오도가도 못하고 궤멸당할 위험이 있었지만 국군은 초전부터 전차공포증에 사로잡혀 탱크의 행렬을 저지할 수단들을 찾지 못했다. 우리의 대전차무기는 57mm포 1백 40문과 2. 36인치포 1천 9백문.
이와 함께 탱크에 타격을 줄 수 있는 105mm야포 10문도 갖고 있었다.
소련이 2차대전 때 대독전에서 썼던 T-34탱크는 중전차다. 차체무게는 76형이 29t, 85형이 31t이었다. 45t이상의 중전차에 비해 기동성은 앞서지만 포탑 정면의 장갑두께는 61(76형)∼94mm(85형)밖에 안됐다.
이는 과거 독일의 「롬엘」전차군단이 아프리카 사막전에서 사용한 팬더 5호탱크(무게 45∼두께 1백 10mm)에 비해 오히려 뒤지는 것.
미국이 역시 2차 대전 때 유럽 및 아프리카와 태평양전선에서 독일과 일본탱크의 공격무기로 사용했던 2. 36인치 로켓포는 무게 1·5kg에 최대사거리 5백50m, 유효사거리 90m.
50m이내의 거리에서 철갑탄을 목표물에 직각으로 명중시키면 두께 1백20mm의 강철판을 관통하는 위력을 지니고있다.
미 보병은 당시 이 로켓포로 독일의 팬더 5호 탱크에 치명타를 입혔고 사이판도와 유황도, 오키나와 상륙작전 때도 일본 탱크를 격파했다.
57mm대전차포 역시 2차 대전 말기 유럽과 태평양 전선에서 많은 탱크 파괴기록을 갖고 있다. 57mm포는 유효사거리는 2km로 돼있지만 탱크장갑을 뚫기 위해서는 역시 50m 안팎의 가까운 거리에서 포탄이 장갑에 직각으로 명중돼야 한다. 그러나 탱크의 가장 취약부위인 무한궤도는 이보다 먼 거리에서 맞혀도 파괴할 수 있다.
이같은 사실들은 2차 대전 때 영국의 병기기술 장교였던「존·윅」의 저서 『대전차전』과 일본전사간행회의 『전차와 싸우는 인간』에서도 상세히 기록돼 있다. 그러나 국군은 실패했다.
기습남침을 받기 훨씬 전부터 그들의 탱크동태를 충분히 파악하고서도 도로상의 대전차호나 장애물시설 하나 제대로 하지 않았다. 수많은 교량도 일단 유사시엔 폭파한다는 계획만 세웠을 뿐 어느 것 하나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예성강철교가 그랬고 임진강철교도 폭파에 실패했다.
그들의 서울점령 주공로인 포천과 동두천 전후의 경원가도만도 44개의 크고 작은 다리가 있었다. 이들 다리만 제때 끊었더라도...무비가 참화를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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