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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의 지식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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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어수선한 시국을 보면서 우리교수들은 「막스·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와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생각하게 된다. 민주화의 바람은 백화제방·백가쟁명의 시대가 오는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내 대통령은 내손으로 뽑자」는 구호 역시 바로 이런 바람을 타고 있는 것이다.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자기정당이나 정파들과의 의견결합이나 행동통일을 위해 늘 가치지향(value-oriented)적이게 마련이다. 정당이란 동일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그리고 정권에의 도전과 획득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뭉쳐진 주장을 증폭시켜 여론화하려는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반면에 「학문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은 어느편이냐 하면 가치중립(value-free)적인 입장을 지니는것이 바람직하다.
대학교수들은 사회가치가 혼란스러운 때일수록 문제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가치 중립적 자세를 지켜야 할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에 대해서는 진정으로 어버이다운 자세로 대해야 할것이다. 아들이 데모하다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졸도해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우리 가르치는 사람들의 책임을 보다 절실히 느끼게 된다.
최근 일부 교수들의 연합시국선언을 보고 그 용기와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이런 일이 「직업으로서의 학문」과 「가치중립」적 자세와 어떻게 조화되는가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성명 내용 중에는 우리의 현실을 감안할때 과격한 주장들이 담겨있는게 사실이다. 특히 그 일부는 특정정파들이 주장하는 정략에 가깝다는 사실도 부인할수 없다.
따라서 그들의 이상과 학문적 선언이 「직업으로서의 정치」에 말려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까지 생기게 한다.
가령 정부형태와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제도에 대해서도 이견은 있을수 있다. 민주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은 소수의 과두적 참모로 구성된 정당들이 타협과 흥정을 통해 짧은 기간에 관직을 교체하는 정치제도인 것이다.
이것은 정부의 지속기간이 짧기 때문에 공무처리과정에서 안정성·조화·신속성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간혹 제기되는 이유가 된다.
때문에 권력의 집중화가 이루어지는 대통령중심제, 더우기 국가의 근대화를 부르짖는 개발도상국가에서는 통치방식이 곧잘 민주정치의 속성인 타협과 흥정보다는 능률에 치중하게 되어 지도자와 관료조직과의 야합으로 출발때의 약속이나 이상과는 다른 장기집권과 독재정치를 유발케되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국가다운 1백개국을 대상으로 볼때 70개국 이상이 내각책임제를 택하고 있고, 더우기 서구 선진국 중에서 대통령직선제를 택하고 있는 나라는 프랑스정도인데 사실상 프랑스도 오를레앙식 내각책임제를 가미하고 있는 실정이다. 선진 민주국가들의 이런 내각책임제 선호 정치현상은 오랜 역사를 통해 민주정치를 해온 경험의 산물인 것이다.
다음으로 운동권 학생들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들이 극렬한 행동을 하게된 원인을 찾지 않고 결과만 보고 좌경이니 용공이니 하는 판단은 옳지 않다. 그 원인을 알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지 마구잡이로 짓누르거나 방관할수 있는 단계는 넘었다. 물론 저들이 주장하는 반미자주화니, 반파쇼민중해방이니 하는 전투적 구호는 위험하다.
과격학생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를 분단시킨 당사자가 미국이며 지금도 미국은 남한을 식민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 전후 처리과정에서 미소가 한반도를 분단시킨 것은 사실이다. 또 독일의 분단논리에서 보면 전범자인 일본이 분단되어야지 왜 한반도가 분단되어야 했는가 라는 얘기다. 그러나 6·25사변에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디로 갔을까? 물론 오늘날 월남은 통일됐지 않았는가 라는 역사의식에서 말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오늘날 우리 세대가 살면서 그래도 상대적으로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관점에서 보는 자세를 버릴수 없지 않은가? 지금 우리들의 논쟁은 보다 나은 생활방식에 대한 것이지만 공산주의와의 논쟁은 생존권 그 자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될것이다.
또한 반파쇼민중해방의 구호속에서는 계급투쟁 의식이 나타난다. 우리사회는 매판자본과 반동세력이 미국과 야합하여 파쇼적이 되어 민중을 억누르고 있기 때문에 이들 소수를 다수가 타도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노동자의 연합이 도모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를 연계시킬수 있을때 민중의 해방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발상이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우리현실에서 이런 논리는 분명히 경계해야 될것이다.
다행히 운동권 학생은 극히 소수다. 그러나 그들이 순수하고 자유분방한 호기심 많은 천진한 학생들을 의식화시키고 있는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다.
우리들이 오늘의 사태가 어찌하여 이렇게 험한 지경이 되었는가 하고 원인을 따지고 책임을 묻고 있는 사이에 젊은 세대는 병들고 희생되어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것이다. 우리 모두는 진정 내자식이라는 의식에서 학생들의 데모나 그로인한 희생을 막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저들의 우발적인 잘못을 전과자로 만들지 말자는 것이고 이를 위해 모든 기성세대가 함께 노력해야 된다는 것이다.
치유될수 없는 좌경 학생들이 있다면 이들에 대한 치유방법을 원천적으로 강구하고 다른 선량한 학생들에의 전염을 예방해 가는 것이 우리학교나 내일의 우리사회의 건강을 위해 긴요한 일이 되지 않겠는가.
오늘의 학생 세대는 어려서부터 학교 교육이 가정보다 중요한 생활 방식이 되면서 가정으로부터의 영향이 약화되는 만큼 학교생활에서의 영향이 커지고 있음도 사실이다.
우리 교수들의 언동이 학생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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