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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택싱] 강신명 “퇴임 후 첫 미션은 설거지·걸레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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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비가 내린 지난달 31일. 기자가 직접 택시를 몰며 민심을 듣는 중앙일보 ‘보이스택싱(voice taxing)’은 강신명(52) 전 경찰청장을 특별 손님으로 모셨다. 14만 경찰조직을 지휘하는 자리에서 물러난 지 8일째 된 날이었다. 강 전 청장은 약속 장소인 강남구 일원역 사거리 인근 도로변에 홀로 우산을 쓴 채 서 있었다. 보이스택싱에 오른 그는 “이렇게 길게 쉬어본 적은 30년 만에 처음”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지내나.
“가사를 분담하자는 아내의 강력한 요구를 받았다. 상의 끝에 요리는 잘 못하니 설거지와 집안 청소를 맡기로 했다. 매일 진공청소기를 돌리고 식사 후엔 설거지를 한다. 걸레질은 일주일에 한 번만 하기로 했다.”
익숙치 않을 것 같다.
“퇴임식 날 저녁식사 후부터 바로 고무장갑을 끼고 투입됐다. 예전부터 설거지에는 나름의 ‘철학’을 가졌었다. 우선 큰 그릇을 거품 일으켜 먼저 닦고 작은 그릇을 닦아서 그 위에 올려놨다가 역순으로 헹구는 방식이다. 물을 적게 쓰면서 효율적으로 설거지를 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 중이다.”
가족들이 좋아하겠다.
“아내한테 칭찬받는다. 옛날 선배 중엔 퇴임 후 일상생활에 적응 못 해 비서진이 몇달 씩 뒤치다꺼리했던 이들도 있었다. 그러면 안 되겠다 생각해 ‘홀로서기’를 연습 중이다. 올해 목표는 스마트폰을 자유자재로 쓰는 것이다. 그걸 못하면 아내한테 독립 못한다. 어제는 스마트폰으로 기차표 예매하는 걸 배웠다.”

강 전 청장은 2003년 임기제가 도입된 이후 두 번째로 임기를 채운 경찰청장이 됐다. 그는 지난해 11월 ‘민중총궐기’ 집회에서 중상을 입은 백남기 농민 사건이 재임기간 중 가장 안타까운 일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병원에 가서 위로 말씀을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원인 분석 없이 사과만 하고 넘어가면 근본적 치유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 미뤘다. 가족들이 제기한 민·형사 소송이 마무리돼 법원 판단이 내려지면 그에 따라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겠다.”

-경찰대 출신 첫 청장이기도 했다.
“부담이 컸다. 특히 검·경 수사권 조정과 관련해 조직 안팎으로 기대가 많았다. 하지만 수사권은 경찰이 요구한다 해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본다. 경찰이 치안활동을 통해 국민의 신뢰를 얻고 난 다음에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수사의 신뢰성,공정성을 높인다면 자동적으로 되는 일이라고 본다.”

강 전 청장에게는 요즘 향후 진로를 묻는 질문이 쏟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는 지난달 16일의 마지막 기자간담회에서 “정치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당시 순간적으로 말실수를 했다. 내 얘기의 방점은 공직 기회가 생기면 열심히 할 것이고 지역구 정치는 하지 않겠다는 쪽에 찍혀 있다. 다만 만에 하나 비례대표 같은 것은 공직 성격이 있으니 할 수도 있다는 취지였다.”

수서IC를 지날 즈음 경찰 지망생 박선미(25·건국대 경찰학과 4년)씨가 보이스택싱에 일부 구간 동승했다. 경찰 시험을 코앞에 둔 박씨가 돌직구를 날렸다.

경찰관 하면 좋은 점은 뭔가요.
“다른 사람에게 봉사할 수 있는 게 좋고 업무영역이 넓어 형사에서부터 경찰행정까지 다양한 분야를 택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마지막으론 연금 포함하면 경제적인 부분도 그렇게 떨어지진 않는다.”
경찰이 가져야 할 소양은요.
“성실성과 책임감이 중요하다. 거기에 무도를 통해 길러진 강인한 체력이 뒷받침되면 더 좋을 것이다.”

목적지인 서울 강남구 수서동 인근에 다다르자 강 전 청장은 저녁식사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 내렸다. 일주일에 3~4번은 저녁약속이 잡혀 있다고 했다. 그는 ‘개업빨’이라며 웃었다.

“퇴직 후 6개월간은 만나자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 뒤에는 슬슬 외로워질 거라고 선배들이 얘기하더라. 그래서 그런지 아직까진 퇴임이 실감나지 않는다. 일단 당장은 가사를 분담하는 게 내 할 일이라 생각하고 적응 중이다.”

자녀들과 시간은 늘었을 것 같다.
“대화할 기회가 많이 생겨서 좋다. 그런데 양면성이 있는 것 같다. 딸이 며칠 전에 시간 많아졌다고 자기 생활에 너무 깊이 관여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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