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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도 반했다, 112㎞ 찍은 여고생 투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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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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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란 안경을 쓰고 야무지게 공을 뿌리는 한국여자야구대표팀 에이스 김라경. 고교 1학년인 그는 ‘직업 야구선수’의 꿈을 키우고 있다. [사진 청스컴퍼니]

멀리서 볼 때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나왔던 큰딸 성보라(류혜영)가 공을 던지는 줄 알았다. 4일 부산 기장군 드림볼파크에서 열린 2016 세계여자야구월드컵 A조 예선 한국(세계랭킹 11위)과 쿠바(8위)의 경기. 동그란 안경을 낀 소녀가 3회 초 마운드에 올랐다. 힘차게 뿌린 공은 시속 105㎞를 기록했다. 강속구의 주인공은 올해 16세의 ‘천재 야구소녀’ 김라경(계룡고1)이다.

한국팀 에이스 16세 김라경
일반고 다니며 학업과 야구 병행
국내선 성인 여자도 못 던진 구속

쿠바전에서 김라경은 2와3분의1이닝 동안 1실점을 기록했다. 지난 3일 파키스탄과의 1차전에서 1과3분의1이닝 무실점을 기록한 뒤 이틀 연속 마운드에 올랐지만 지친 기색 없이 씩씩하게 공을 뿌렸다. 한국은 6회 말에만 3점을 내며 4-3으로 역전승을 거뒀다. 2연승을 거둔 한국은 5일 베네수엘라전 결과와 관계없이 각조(A~C) 상위 2팀씩 6팀이 나서는 수퍼라운드 진출을 확정했다.

야구 본고장인 미국에선 여자야구가 활발한 편이다. 지난해엔 메이저리거 출신 존 후덱의 딸인 세라(19)가 미국대학야구 사상 최초로 정식선수로 등록해 화제가 됐다. 일본 역시 여자야구의 저변이 넓다. 15세 이하 유소년 야구는 물론 세미프로 팀까지 활동 중이다. 세계랭킹 1위로 월드컵 5연패를 노리는 일본 대표팀은 ‘마돈나 재팬’이라는 근사한 별칭까지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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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야구대표팀 에이스 김라경의 깔끔한 투구 자세. 최고 시속 110㎞대의 공을 던진다. [사진 청스컴퍼니]

한국은 사정이 다르다. 남자 야구는 세계 정상급이지만 여자 야구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덕수정보고 출신 ‘1호 여자 선수’ 안향미(35)가 ‘비밀리에’를 창단한 뒤 팀 수가 40개까지 늘어났지만 여전히 ‘그들만의 리그’일 뿐이다. 중·고등학교 여자야구는 1개 팀도 없다. 동호인 팀에서 뛰는 선수 대부분은 다른 일을 하면서 주로 주말에 훈련을 한다.

국내 여자야구의 저변은 취약하지만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여자야구월드컵이 3일 부산에서 개막했다. 11일까지 열리는 이번 대회는 국제야구소프트볼연맹(WBSC)이 주관하고 LG전자와 LG생활건강이 공식후원한다. 이번 대회에는 역대 최대 규모인 12개국 300여 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수퍼라운드에 오른 한국은 대회 첫 4강 진출을 노린다. 김라경은 여자월드컵에 출전한 한국여자야구 대표팀의 막내이자 에이스다. 그는 시속 110㎞대의 공을 던진다. 지난해 8월 LG컵 국제여자야구대회에선 시속 112㎞를 기록했다. 국내 여자 성인선수들도 기록하지 못했던 볼 스피드다. 120~130㎞대를 던지는 남자 중학생들보다는 느리지만 웬만한 사회인 야구팀 선수들도 치기 어려운 강속구다.

세계 정상급 여자 투수들은 보통 120㎞대의 공을 뿌린다. 김라경은 구속도 구속이지만 투구폼이 좋다는 평가를 듣는다. 하체를 활용해 공에 힘이 실려있고, 변화구의 낙폭도 큰 편이다. 지난해 여자 대표팀을 한 차례 지도했던 선동열 전 KIA 감독은 김라경을 보고 “투구 폼이 예쁘다”며 스파이크를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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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라경이 야구를 시작한 건 오빠 덕분이었다. 친오빠인 김병근(23)은 프로야구 한화 2군에서 투수로 활약하고 있다. 김라경은 “오빠를 따라 어릴 때부터 야구장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다른 애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 나는 야구공을 가지고 놀았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야구를 시작했다”고 털어놓았다.

남자들과 함께 리틀야구를 하던 그는 중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야구공을 놓지 않았다. ‘여자가 무슨 야구냐’며 깔보는 시선도 있었지만 그는 야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김라경은 “리틀야구팀 소속이던 6학년 때 커브를 배운 뒤 꾸준히 연마했다 ”고 말했다.

‘천재 야구소녀’라는 수식어도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다. 김라경은 “‘내가 천재 야구소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실력을 갖췄을까’ 부끄럽기도 하다. 그래도 여자야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면 좋은 일 아니겠느냐”며 웃었다. 그는 또 “팬들이 눈높이를 프로야구가 아닌 여자야구에 맞춰서 바라보면 분명 다른 매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라경은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을 던지는 게 처음이었다. 자리를 가득 메워주신 관중들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대회를 통해 나처럼 야구를 하고 싶어하는 여성들이 무척 많다는 걸 깨달았다.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여자야구 활성화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부산=안희수 기자 An.heesoo@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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