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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넌 좋은 사람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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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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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선
경북대병원 소아청소년
정신건강의학과 부교수

막 전문의가 됐을 때다. 수술을 받고 회복을 기다리던 환자가 연달아 뛰어내리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일이 계기가 돼 세미나에서 자살을 주제로 발표를 하게 됐다. 그때 처음 보게 된 책이 2001년 출판된 『자살, 불필요한 죽음(Suicide: an unnecessary death)』이었다. 자살률이 높은 스웨덴의 국립 자살 연구 및 예방연구소 다누타 바서만 박사가 쓴 책이다. 나이가 들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인 자살에 ‘불필요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인 게 참 적절하게 느껴졌다. 특히나 아이들의 자살 소식을 접할 때면 나도 모르게 이 단어를 중얼거리게 된다.

자살률 OECD 1위이지만
특히 청소년 자살률 매우 높아
아이들 불필요한 죽음 막아야
가정은 일관적 양육 관심 갖고
학교는 게이트 키퍼 역할 해야
심리적 부검 위한 입법 필요

우리나라는 ‘자살 공화국’이라 불릴 정도로 자살률이 높다. 2010년 자살률이 인구 10만 명당 31.2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1위다. 더 큰 문제는 청소년들의 자살률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15~24세 청소년 사망 원인 1위가 바로 자살이다. 인구 10만 명당 13명꼴이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도 한동안 아이들이 학교폭력을 견디다 못해 괴롭힌 사람의 이름을 적어놓고 연달아 뛰어내리는 일이 있었다. 그 여파로 학생정신보건연구센터라는 기관이 2012년 설립됐고, 국립대학교 소아청소년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인 내가 센터장을 맡게 됐다. 센터의 문을 열자마자 중간고사 도중 고1 학생이 자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부랴부랴 팀을 꾸려 학교 현장에 갔다. 멍한 표정의 선생님들, 목이 자꾸 탄다는 교장 선생님과 회의를 한 뒤 교실에 들어가 보니 자살한 학생 바로 뒤에 앉아 있던 학생이 내내 엎드린 채 일어날 줄을 몰랐다.

친하던 사람이 갑작스럽게 사망했을 때 나타나는 정상적인 애도 반응에 대해 알려주고 서로를 돕는 법에 대해 설명했다. 아이들이 쓴 애도 카드에는 “내가 시험을 못 쳐서 그날 네가 인사를 할 때 제대로 대꾸도 못했어. 그게 마지막일 줄이야. 내가 인사를 안 받아줘서 그런 선택을 한 거니? 정말 미안해”와 같은 문구들이 적혀 있었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이 엿보였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는 아이들의 마음속에 이렇듯 무거운 생각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물었다. “우리가 뭘 더 도와주면 좋겠니?” “우리 선생님 좀 도와주세요. 표정이 너무 어두워요. 웃지를 않아요.” 선생님들을 돕는 게 아이들의 빠른 회복에 중요하다는 점을 우리는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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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어린아이들이 이런 슬픈 선택을 할까. 미국에서 실시한 아동기 부정적인 경험(Adverse Childhood Experience, ACE) 연구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이 연구는 성인을 대상으로 18세 이전에 10개의 부정적 경험을 한 적이 있는지를 조사했다.

신체 학대, 정서 학대, 방임, 성폭력, 부모의 이혼, 부모의 우울증, 부모의 부재, 부모의 사망, 부모의 잦은 다툼 등과 같은 가정폭력 목격, 부모의 범죄로 인한 투옥 등과 같은 일이다. 연구 결과 이 중 6가지 이상을 경험한 성인의 경우 이런 경험이 없는 사람에 비해 자살할 확률이 5000배나 높았다고 한다.

그럼 뇌가 발달하는 과정 중인 아이들의 경우는 과연 어떨까. 감정을 조절하고 충동적인 감정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도록 하는 뇌의 조절 능력은 어린 시절 부모님과의 안정적 애착을 통해 발달한다. ‘불필요한 죽음’을 막는 데는 일관성 있는 양육, 좋은 가족 관계, 가족으로부터의 지지, 부모가 자신을 진정으로 위한다고 느끼는 것과 같은 요소들이 매우 중요하다. 고립되고 보호받지 못한다고 느낄수록 죽음이 유일한 도피처라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

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 아이가 사회와 연결돼 있다는 느낌을 가지는 것, 좋은 친구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것도 중요한 보호인자이다. 실행 능력이 떨어지는 초등학교 저학년이나 학령전기(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을 다닐 무렵)에 자살을 시도하는 아이의 경우엔 반드시 학대 여부를 살펴봐야 한다.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학대받거나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빨리 식별해서 전문가와 연계해 ‘불필요한 죽음’을 막는 게이트 키퍼의 역할을 해야 한다. 최근 심리적 부검을 위한 입법이 진행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아이들이 왜 이런 선택을 하는지 이제는 제대로 알아야 한다.

오늘도 우리 센터는 어느 학교를 다녀왔다. 한 아이가 쓴 편지가 마음을 울린다. “얼마나 힘들면 그런 선택을 했니? OO가 너무 힘들어해. 맨날 울어. 우리 OO 잘 지켜줘. 하늘나라에서는 푹 쉬어. 넌 좋은 사람이야! 안녕.” 그 아이가 살아 있었을 때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 줄 수 있었더라면 과연 그 아이가 ‘불필요한 죽음’을 선택했을까? 힘들어 보이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능력, 그런 작은 배려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때다.

정운선 경북대병원 소아청소년 정신건강의학과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