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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청″주석의 몸 식기도 전에 나를…〃|중공, 모 사후「4인 방」체포 비록 공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올해는 중공의 문화혁명이 시작된 지 20년, 강청 등 4인 방이 체포되어 문화혁명이 종결된 지 10주년을 맞는 해다.
지난 76년9윌 주석 모택동 사망 후 그해 10월 강청 등이 체포될 때까지의 숨막히는 권력투쟁내막이 최근 중공 각지방지에 생생하게 밝혀져 온통 떠들썩하다.
원문은 월간문학지「중국」제4호에 발표된 보고서를 인용하고 있으나 각 신문이 이를 경쟁적으로 보도한 것을 보면 당의 승인을 얻은 것 같다고 아사히(조일) 신문은 30일 북경발로 보도했다.
다음은 이 기사를 간추린 내용.
◇모택동 주석 유언의 진실=1976년9월9일 미명, 모택동은 북경시 서쪽의 자택(현재의 조어대 국빈관의 일부로 보임)에서 사망했다.
자택은 당·정부의 중추기관이 있었던 중남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눈을 감은 장소는 중남해는 아니었다. 엽검영(당시 부주석)등이 그의 죽음을 지켜봤다.
엽은 주석이 유언을 남겼느냐는 질문에 모는 의식이 몽롱한 가운데 『후계문제는 골육 상쟁으로 밖에 결정될 수 없는 것인가』라고 했다고 답했다.
모의 부인 강청 등 4인 방은 인민일보 등의 사설을 통해 모가 유언으로『기존의 방침대로 일을 진행하라』고 했다면서 자파가 정통후계자라고 주장했었다.
◇강책과 엽검영의 대결=모의 유해는 인민대회당에 옮겨졌고 약4백여 명에 달하는 중앙위원들이 고별인사를 했다. 이때 강청은『주석, 일어나세요. 잠에서 깨어나 함께 집으로 돌아갑시다』라고 울면서 소리쳤다.
그러나 휴게실에서는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다. 슬픔에 빠져 침통한 모습을 하고있는 강청을 염려한 한사람이 다음날로 예정된 당 정치국 회의에 참석하지 말도록 권유했다. 그리자 강청은『죽더라도 가겠다. 대관절 누가 누구를 때려 누이는 지를 끝까지 지켜봐야지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고 흥분했다.
이 자리에 동석한 왕홍문(당시 부주석), 장춘교(당시 정치국 상무위원) 등 강청파와 엽간에「기정방침대로」라는 모의 유언이 진실인지의 여부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엽은『이 말은 몇 사람을 때려잡겠다는 의미를 갖고있다』면서『나는 소위 유언이라는 말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모른다』고 반격을 가했다.
◇4인 방 체포의 결정=10월5일 미명, 조어대 국빈관에서 영화감상을 마친 강청은『기분이 좋지 않다. 목적한 대로 일이 추진되지 않으면 나는 체포되어 죽을 것이다. 나는 단호히 일을 해치우기로 결심했다』고 장춘교·왕홍문에게 결의를 표명하고 앞으로의 행동계획을 의논했다.
한편 같은 날 하오 중앙군사위원회 작전 실에는 엽검영·이선념·왕동흥·진석련 등 요인이 회동했다.
이선념이 먼저『강청파가 곁으로는 안 그런 체 하지만 뒤에서 악랄하게 일을 꾸미고 있다. 우리들이 일어서야 할 것』이라고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엽이 궐기를 제안, 당 중앙의 결정으로 강청·장춘교·왕홍문·요문원 등 4인 방을 체포, 타도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왕동흥(당시 당 중앙판공청주임)이 군중앙 경위 단에 4인 방을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최후의 순간=체포극은 10월6일 심야부터 7일 새벽에 걸쳐 이루어졌다.
강청은 중남해의 거실에서 잠을 자다 깨워졌다. 한순간 멍청했으나 목전에서 체포 장을 읽어주자 깜짝 놀라며 『이것은 음모다. 주석의 몸이 아직 완전히 식지도 않았는데 나에게 손을 대는 것이냐』며 소란을 피웠다.
장춘교도 중남해의 거실에서 일기를 쓰고 있다가 체포되었는데 그다지 당황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왕홍문과 요문원은 중남해에서 회의가 소집되었다는 가짜통지로 호출되어 올라온 즉시 체포되었다.
◇화국봉에 대한 기록=강청 등 4인 방의 체포에 관해서 지금까지 화국봉(당시수상, 4인 방의 체포직후에 당 주석이 됐으며 81년에 해임)이 큰 역할을 하는 등 공이 있었다고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 기록에 의하면 4인 방 체포의 전후 기술 중에 화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좌경사상이 비판되어 실각한 화의 공적을 사실에 남기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당시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동경=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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