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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휴대전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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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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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
사회2부 부데스크

2013년 5월 13일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자국 검찰이 폭스뉴스 기자 제임스 로센의 통신 내역을 조사했다고 보도했다. 영장을 발부받아 통신사로부터 제공받은 것이었다. 영장에는 스티븐 김의 간첩법 위반 행위에 대한 공범 혐의 수사에 필요하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미국 국무부 직원으로 활동하던 재미동포 핵과학자 스티븐 김(48·한국명 김진우)이 북한 핵 활동 관련 정보를 유출했고, 그 대상자가 로센으로 의심받으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국기 문란’ 사태로 볼 만한 사안이었다.

그런데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오바마 행정부가 언론 자유의 근본을 위협하며 기밀 보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의 경계를 넘었다’고 지적했다. 워싱턴포스트 기자 대너 밀리뱅크는 ‘리처드 닉슨이 꿈꿨을 법한,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기술을 정부가 사용했다’고 썼다. 뉴욕타임스·워싱턴포스트와 폭스뉴스는 가까운 사이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스뉴스 기자 통신 내역 조회를 신랄히 비판했다.

이 문제는 미국에서 주요 뉴스로 다뤄졌다. 의회는 법무부를 추궁했다. 그해 7월 12일 미국 법무부는 ‘미디어 관련 가이드라인 검토 보고서’라는 6쪽짜리 문건을 내놓았다. 기자의 통신 정보를 뒤진 것은 과도한 조치였다고 사실상 인정한 것이었다.

2010년 8월 19일 영국의 전국언론인연맹(NUJ)은 경찰을 비난하는 성명을 냈다. 북아일랜드 경찰이 이몬 맥더모트라는 프리랜서 기자의 휴대전화를 압수한 데 따른 일이었다. 맥더모트는 북아일랜드 독립 운동에 대한 기사를 종종 쓴 기자였다. 북아일랜드 경찰은 NUJ의 비판을 받은 뒤 휴대전화를 돌려줬다.

구글에서 영어로 쓰인 ‘기자 휴대전화 압수’ 관련 기사를 검색해 봤다. 미국에서는 한 건도 사례를 찾지 못했다. 통신 내역 조사는 몇 건 나오는데 해당 사건 내용보다 이에 대한 사회적 비난을 보도한 뉴스가 훨씬 많았다. 헌법 제1조에 언론의 자유를 명시해 놓은 나라답다. 영국에서의 압수는 맥더모트 건이 유일했다. 수년 전 왕실 정보 유출 사건으로 경찰이 신문사를 상대로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을 때도 전화기 압수는 없었다.

기자가 치외법권 지대에 사는 것은 아니다. 불법 행위에 대한 책임은 마땅히 져야 한다. 그러나 기자에게 정부 비판자, 내부 비리 제보자가 전화를 걸 때 통화 사실이 다시 정부에, 그 ‘내부’에 전해질까 봐 두려워해야 하는 나라에서 언론 자유는 온전하기 힘들다.

이상언 사회2부 부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