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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암행어사 정약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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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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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
논설위원

지난 토요일 밤 전남 강진에서 서울로 오는 버스 안. 다산(茶山) 정약용 유적을 순례한 ‘실학기행 2016’을 마무리하는 자리가 열렸다. 참가자 40여 명이 2박3일간의 감회를 털어놓았다. 피폐한 민생을 날카롭게 파헤친 다산을 오늘에 되살리자고 입을 모았다. 이날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한 평범한 주부의 고백이었다. 건축과 교수의 아내인 그는 처음부터 목소리가 떨렸다. “매우 혼란스럽다. 아이를 다시 기르고 싶다”고 했다.

사연은 뭉클했다. 남편도 서울대, 아들·며느리도 서울대를 나왔지만 그간 별 감동이 없었다고 했다. 살림하는 여자로서 되레 상처를 받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런데 다산에서 리더의 중요함을 배웠다고 했다. 강진 유배 시절 18년 내내 나라를 걱정하고, 두 아들을 격려하는 편지를 띄우고, 500여 권을 저술한 다산을 돌아보며 “지금 어떤 엄마, 어떤 아내, 어떤 시어머니가 돼야 하는지를 여쭙고 싶다”고 울먹였다.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다산의 일생은 불우했다. 우울증도 앓았다. 한양에서 전갈이 오면 ‘사약을 내리는 건 아닌지’ 하는 죽음에 대한 공포심에 휩싸였다. 그럼에도 그는 늘 백성을 보살피는 목민(牧民)을 강조했다. 학정(虐政)에 신음하는 민초를 걱정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 훌륭한 지도자가 나타나길 바랐다. 강진 다산초당 바위에 직접 새긴 ‘정석(丁石)’ 두 글자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딛고 일어서려는 다산의 굳은 심지를 일러준다.

다산의 생애에서 가장 복된 시절은 암행어사 때였다. 1794년 서른셋의 나이에 임금 정조로부터 어사패를 받은 그는 경기 북부 지역의 실정(失政)을 조사했다. 정조를 보좌하던 지관(地官) 김양직과 어의(御醫) 강명길이 각각 연천 현감과 삭녕(현재 북한 땅) 군수 시절 저지른 비행을 처벌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법을 적용할 때는 마땅히 임금의 최측근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라고 읍소했다. 정조도 다산의 요구를 선뜻 받아들였다.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은 2년 전 펴낸 『다산평전』 첫머리를 ‘암행어사 출두요!’로 연다. “젊은 시절 암행어사 한 차례 경험이 다산의 통치 철학과 경세 논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청와대 최측근 비리 의혹과 관련해 여야·기업·검찰·언론이 흙탕물처럼 뒤엉킨 눈앞의 정국, 진정 ‘암행어사 출두요!’를 외치고 싶은 심정이다. 예전 당파 싸움은 최소한 대의명분이 있었다. 언제까지 백성이 지도층을 걱정해야 할까. 공평무사한 수사 결과를 기다린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