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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펜 하나로 슥슥 드로잉쇼, 두 달 새 800만이 봤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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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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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기 작가가 직접 그린 자화상 위에 붓펜을 대고 있다. 그는 자화상에 눈을 6개나 그린 이유에 대해
“언제나 앞뒤를 가리지 않고 많이 보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가로 5m, 세로 2m 길이의 거대한 캔버스 앞에 선 남성. 붓펜으로 백지 위에 석유 시추선을 그리더니 거침없는 손놀림으로 그림을 확장해간다. 유조선에서부터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는 사람들의 모습 등 디테일한 묘사로 여백이 점점 채워진다. 마침내 그림을 완성한 남성이 자리를 떠나자 종이 위엔 거대한 세계 지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최근 SNS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에너지화학기업 SK이노베이션의 ‘빅 픽쳐 오브 이노베이션’ 광고 영상이다. 지난달 페이스북과 유튜브 등에 공개된 이 영상은 두 달 만에 800만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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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이노베이션 광고에서 김 작가가 그린 그림 ‘빅 픽쳐 오브 이노베이션’의 일부분. [사진 SK이노베이션]

영상에 등장한 김정기(41) 작가는 밑그림이나 참고자료 없이 즉석에서 그림을 그리는 ‘라이브 드로잉 쇼(Live Drawing Show)’ 전문가다. “광고는 2분이지만 실제론 사흘에 걸쳐 17시간 동안 그렸어요. 수정 없이 단 한 번에 완성해야하기 때문에 사전 준비도 많이 했죠.” 26일 서울 홍익대앞 작업실에서 만난 김 작가는 라이브 드로잉을 ‘과정의 예술’이라고 정의했다. “사람들은 전시회에서 완성작만 보니 그림이 어떻게 만들어질까에 대한 궁금증이 많아요. 라이브 드로잉은 그 과정까지 감상할 수 있는 새로운 장르죠.”

김정기 라이브 드로잉 작가
가로 5m 캔버스에 유조선, 주유소…
SK이노베이션 광고 영상 만들어
“라이브로 만화 연재도 도전할 것”

어렸을 때부터 만화가를 꿈꾸던 김 작가는 “그림에 관한 일이라면 안 해본 게 없다”고 했다. 20살 때부터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가르쳤고,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다 중퇴한 뒤로 만화가와 웹툰작가로도 활동했다.

그런 그가 라이브 드로잉에 재능을 발견한 건 2011년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다. “9m 길이의 부스를 꾸며야 하는데 다른 작가들처럼 작품을 걸어놓지 말고 낙서하듯 그림을 그려보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가 나왔어요. 그걸 영상으로 찍어 재미삼아 유튜브에 올렸는데 호응이 예상보다 뜨거웠고, 프랑스에서 초청까지 받았어요.” 2014년엔 세계 최대 경매업체인 크리스티 경매에 한국 전설을 소재로 한 라이브 드로잉 영상과 완성작을 함께 출품해 1200만원에 판매했다.

김 작가는 1년 중 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낼 정도로 국내보다 미국과 유럽에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최근엔 영화 및 만화 제작사인 마블사의 요청으로 만화 ‘시빌워2’의 표지를 그리기도 했다. 그는 “전 세계를 다니면서 라이브 드로잉쇼를 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콜라보레이션(협업) 제안을 받다 보니 해외 활동의 비중이 80% 정도 된다”고 했다.

문득 어떤 소재라도 즉석에서 그려낼 수 있는 그의 머릿속이 궁금해졌다. 그는 “그림일기”라며 항상 가지고 다니는 노트를 보여줬다.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와의 만남, 가족 여행 등 다양한 순간들이 그림으로 기록돼 있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항상 사람과 공간을 관찰하려고 노력하죠. 때론 일상에서 영감을 얻기도 해요.”

그는 또 다른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완성된 만화를 연재하는 웹툰과 달리 라이브로 만화를 연재할 계획”이라며 “남들은 가보지 않은 영역에 끊임없이 도전해 작가들이 좋아하는 작가가 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글=천권필 기자 feeling@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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