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단 해외 채권자들 잇단 상환 유예…국내 채권단 꿈쩍 안 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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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독일·프랑스등 한진해운의 해외 금융기관들이 한진해운의 선박금융 채권 상환 유예에 동의했다. 최대 선박금융 채권자인 독일 HSH노르드방크를 비롯해 독일 코메르쯔방크·프랑스 크레딧아그리콜은 27일 한진해운에 e메일을 보내 선박금융 채권 상환유예 동의 의사를 전달했다. KDB산업은행이 보증하지 않으면 상환을 유예하지 않겠다던 기존 입장을 뒤집은 것이다.

독일·프랑스 기관 입장 뒤집어
해외 24곳 동의 땐 4700억 유예
산은 “신규 자금 지원은 없다”

이들 3사는 모두 한진해운 선박금융 채권액이 상위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이들만 3년6개월 이내 만기인 선박금융 상환을 유예해주더라도 한진해운은 1280억원의 자금을 조달한 효과가 있다. 통상 대형 채권은행의 결정을 따르는 관행을 감안하면 24개 해외 채권은행이 모두 동의할 경우 한진해운은 4700억원을 당장 안 갚아도 된다.

한진해운에게 선박을 가장 많이 빌려준 최대 선주사 시스팬도 용선료 조정에 동의했다. 시스팬은 KDB산업은행 동의를 조건으로 용선료 조정에 합의했다. 이로써 한진해운은 총 8000억원 규모의 용선료 협상을 끝냈다. 선박금융 유예와 용선료 조정으로 총 1조2700억원을 조달한 효과를 누린 셈이다.

이에 대해 채권단은 “달라진 건 없다”는 입장이다. KDB산업은행 관계자는 “애초 선박금융 상환 유예를 전제로 부족자금(1조~1조2000억원)을 산정했다”며 “한진그룹이 원래 자구안(4000억원)보다 최소 6000억원을 더 내놓지 않으면 자율협약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신규 자금 불가 원칙도 재확인했다.

채권단은 30일 한진해운 자구안 수용 여부에 대한 의견을 모을 예정이다. 채권단의 75% 이상이 자구안에 반대하면 한진해운은 다음달 4일 법정관리 절차를 밟는다. 이렇게 되면 한진해운의 부채 5조6000억원 중 선박담보대출 형태인 선박금융(3조2000억원) 채권자는 선박을 처분해 돈을 회수하게 된다. 그런 다음 1조원을 대출해 준 국내 은행과 회사채 투자자(1조2000억원)가 나머지 자산을 나눠 갖는다. 회사채 투자자 중 4300억원 어치의 프라이머리 유동화증권(P-CBO) 보유자는 원금을 회수할 수 있다. 정부의 회사채 거래 활성화 방안에 따라 P-CBO의 지급보증을 선 신용보증기금이 손실을 대신 떠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한진해운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국내 산업 피해는 17조원이 넘을 것이라고 한국해양산업총연합회(한해총)가 28일 밝혔다. 원양 정기선사는 화주가 수만명이다. 법정관리를 시작하면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회생 가능성을 설득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 거래 업체들은 납품 대금을 조금이라도 받기 위해 앞 다퉈 자산을 가압류한다. 금융권 관계자에 따르면 28일 현재까지 화물하역운반업체(2000억원대)·장비대여업체(1000억원대)·선박용 기름(벙커C유) 제공업체(300억원대) 등이 한진해운에 물려 있는 돈은 6000억원이 넘는다.

이들이 담보권을 행사하면 모든 선박이 억류된다. 화주들이 맡긴 120만 개의 컨테이너 역시 발이 묶인다. 화주들은 손실 보전을 위해 소송을 제기한다. 현재 이들이 한진해운에게 맡긴 화물가액은 140억달러(16조원)에 달한다. 한해총에 따르면 2337명이 일자리를 잃는다. 한해총은 29일 열리는 ‘마리타임코리아 해양강국포럼’에서 이런 산업 피해 시나리오를 공개할 예정이다.

문희철·이태경 기자 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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