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신을 생각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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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 대학생이 또 분신 자살했다. 충격과 가슴 아픔을 금할 수 없다. 아마 모든 부모들, 아니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의 심정이 그러했을 것이다.
5월의 신록이 생명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구가하는 계절에 그 신록같이 푸르고 싱싱한 젊음이 왜 그처럼 어이없이 앞날을 포기하고 자신의 생명을 불태워 버렸을까.
20일 서울대 5월제 행사 도중 분신 자살한 이동수군의 경우 이미 수일 전 친구에게 분신을 결심한 내용의 편지를 미리 보낸 것으로 보아 일시적인 충동에 의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이에 앞서 지난달 서울대에서는 반정부 시위 도중 2명의 학생이 분신 자살을 기도, 한 명 은 숨지고 한 명은 아직도 병원에서 가료중이다.
여기서 이들의 분신동기를 새삼 얘기할 필요는 없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에게 단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스스로 버리기까지는 그 나름의 절실하고 절박한 동기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동기를 그런 방법으로밖에는 해소할 길이 없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좀 더 냉정하고 객관적인 반성이 있어야만 한다. 분신할 용기가 있었다면 살아서 현실과 싸울 용기로 승화 시켰어야 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현실에 대한 불만은 있게 마련이고 그 불만을 해소할 길이 막연할 때 절망을 느낀다. 그러나 불만스런 현실을 개선하고 개조해 나가는 역정이 곧 삶이요, 크게 보면 역사가 아닌가.
이런 말도 있다. 신이 우리들에게 절망을 주는 것은 우리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속에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다.
이상을 추구하며 개인과 사회의 환경을 끊임없이 개선해 나가는 노력은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절망 앞에 좌절하기보다는 절망을 극복해야 한다.
내가 살아 있음으로 해서 나의 뜻이 펴질 수 있으며 그 뜻을 실천하려는 노력도 가능한 것 아닌가.
젊은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당사자 개인으로서는 생의 포기에 그칠지 모르나 그를 사랑하는 부모나 가족들에게는 얼마나 심통함을 주는 일인가. 커다란 불효요, 죄악이 된다는 사실도 생각해야 한다.
사회적으로는 훌륭한 인재의 상실이란 점에서 그 또한 가슴아픈 일이다.
요즘 더욱 심해지기만 하는 과격한 학생시위와 잇따른 분신자살이라는 극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도 우리 사회는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언제까지 최루탄과 경찰병력으로만 대응할 수는 없다. 이러한 사태를 일부과격「좌경」학생들의 책동이라는 관점에서만 대응하면 피차의 과격경쟁으로만 치닫기 쉽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그 어느 편에서도 얻는 것 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더 큰 불행이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치닫기 전에『이제 그만!』하는 이성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어느 한쪽의 노력과 자제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바로 우리 모두의 고민이요 갈등이며, 「나의 일」로 알고 난마를 풀어가야 한다.
이 시국을 수습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신명을 걸고 나서서 무언가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젊은이들이 분신을 하는 그 상황을 피안의 화재로만 바라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젊은이들은 또 그런 노력을 지켜보며 기다리는 은인자중의 이성과 지혜를 가져야 한다. 분신만이 유일한 용단이요, 최강의 의사표시는 아니다. 보다 원대하고, 보다 장엄한 삶의 설계 속에서 생을 보다 값있게 불태울 수 있는 길을 묵묵히 가는 것도 훌륭한 용단이요, 감동을 주는 행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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