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단청에 뿌리둔 토속의 멋 한국적 채색화의 진면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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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내고 박생광화백 (1904∼1985)의 작품에는「원색의 힘」 이 생동하고 있다.
수묵담채가 주축인 한국 화단에서 내고는 단청에 뿌리를 둔 적·청·황·녹색을 자연스럽게 구사, 우리 색깔을 되살려 냈다.
한때 국전에서조차 밀려났던 채색화가 내고와 김기창·천경자씨등의 노력으로 빛을 보게됐다.
67년 16회 국전에서 동양화부의 채색화 37점이 무더기로 낙선, 이에 항의하는 「낙선작가전」 (덕수궁 중화전옆건물)을 연 일이 있다.
이때 입선자 41명의 75%가 묵화였고, 이중 62%가 산수화였으며 채색화 계통은 3명뿐이었다. 입상자 5명도 모두 묵화를 그린 작가들이어서 「채색화 푸대접론」은 이유있는 반항으로 받아들여졌다.
우리 동양화는 북종화·남종화·문인화등으로 나뉘어서 발전해 왔다.
그러던 것이 광복후 일본화에 대한 본능적 반채색 감정이 채색화를 왜색으로 밀어붙여 수묵담채의 남종화만 각광을 받는 이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채색화에 활로를 연 작가가 바로 박생광·김기창·천경자씨 팀이다.
박생광·천경자씨는 홍익대에서, 김기창씨는 수도녀사대에서 줄기차게 채색화를 가르쳤다.
이번 박생광전의 의의도 한국적 채색화의 진면목을 보이자는 데 있다.
내고는 우리 민화·불상· 토기· 무속등에서 한국의 빛깔을 찾아냈다.
그가 찾아낸 색채는 토속적인 것이어서 우리와 친숙해 아무리 강렬해도 거부감이 없는 게 특징이다.
내고는 한마디로 자신의 예술 외에 다른 것엔 아랑곳하지 않은 작가다. 동양화가 천경자씨는 내고가 홍익대교수로 올 때의 일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제가 좀 먼저 자리잡고 있었던 까닭으로 선생을 모시기 위해 처음 만나뵈 온 자리에서 이력서를 한통 주십사고 했는데 마산 다녀와서 주마던 선생님의 말씀이 저를 퍽 즐겁게 해주였습니다.』
그때 (68∼74년)만해도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로 어려워 이력서를 달라면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다 냉큼 내주던 시절인데 내고는 그런 시속에 얽매이지 않은 순진무구한 작가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내고는 토요일·일요일도 없이 홍익대 미술실기실에서 열심히 학생들을 지도,다른 교수들의 시새움까지 받았지만 제자들에게는「성실」의 본을 보여준 훌륭한 교수였다.<이규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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