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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월요일] 팔보채·마라탕에 칵테일…젊은층 새 명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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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한국에서 중국음식은 오랫동안 ‘화교’ ‘인천 차이나타운’ ‘짜장면’ 같은 단어들로 연상돼 왔다. ‘광둥(廣東)요리’ ‘쓰촨(四川)식’ 같은 세분화가 시작된 것도 그리 오래지 않다. 호텔급 중식당이든 동네 중화반점이든 가족이나 직장 동료끼리 주로 ‘식사’를 하는 외식 공간이었다. 고량주나 소주는 곁들이는 반주 정도였다.

빵에 싸먹는 베이징덕, 원탁 대신 바
고량주 칵테일, 와인·위스키·문배주까지
퓨전음식, 다양한 술로 트렌드 이끌어
“광둥·쓰촨식 아닌 서울식 중국 요리”

최근 이런 도식을 무너뜨리는 제3의 중식당이 잇따라 생겨나고 있다. 일반 중식당에 비해 음식 가짓수가 많지 않은 대신 술은 고량주 외에도 와인·위스키·한국전통주 등 선택 폭이 다양하다. 대체로 식사 위주인 점심 영업을 하지 않고, 저녁에 술 한잔 하며 일품요리를 즐기도록 유도한다. 짜장면 대신 마라탕이 있고, 화교 출신이 아니라 요리학교 출신 한국인 셰프가 웍(wok·중국식 냄비)을 돌린다. ‘중식당’ 하면 떠오르는 원탁 테이블은 사라지고 바(bar) 형태의 좌석 등 인테리어도 현대적이다. 일식주점인 이자카야를 연상시키는 일종의 ‘중식주점’이다.

“우리가 내는 중국요리는 광둥식도 쓰촨식도 아니에요. 서울이라는 메트로폴리탄 도시에 맞게 변형한 ‘서울식 차이니즈 요리’를 술과 함께 즐기자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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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바밍고’에선 루콜라를 얹은 깐풍꽃게, 번(bun)에 싸먹는 베이징덕 등. [사진 장진영 기자]

요즘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자주 등장하는 이태원 중식주점 ‘바밍고’의 추찬석 대표의 말이다. 이태원 ‘현대 라이브러리’ 뒤편 골목길에 자리 잡은 ‘바밍고’는 핑크색 네온사인 간판부터가 이국적이다. 내부에 들어서면 조도가 낮은 조명 아래 거대한 플라스틱 용 모형 두 개가 팝아트적인 활기를 뽐낸다. 와인·위스키 진열대 앞엔 십수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바 형태의 커뮤널(communal·공동의) 나무탁자가 놓여 있다. 붐비는 저녁 시간엔 낯 모르는 사람들끼리 섞여 앉는 자리로 기존 중식당에선 볼 수 없던 파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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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 중식을 와인과 즐길 수 있고 바 형태의 커다란 공동 테이블에 허물없이 섞여 앉는다. [사진 장진영 기자]

스위스 등 해외에서 레스토랑 경험을 쌓은 추 대표는 “와인과 중식이 잘 맞는다고 생각해 열게 된 곳”이라고 말했다. 화이트 10종을 포함해 총 19종의 와인과 위스키·칵테일 등을 갖췄다. 중국술의 대명사인 고량주는 1종만 있다. 술을 먼저 고르면 홀 직원이 어울리는 요리를 추천해 준다. 탕수육·깐쇼새우 같은 중국 요리를 내면서도 살짝 변형을 가했다.

예컨대 ‘바밍고 덕(duck)’은 오리껍질을 바삭하게 튀긴 요리인 베이징덕을 자체 스타일로 풀어 낸 요리다. 오리껍질과 가늘게 채 썬 파 등 재료는 비슷하지만 밀전병이 아니라 대만식 빵인 ‘번(bun)’에 싸 먹는다. 지난 3월 오픈 때부터 함께한 정의훈(36) 셰프는 “일식 공부를 하러 간 요코하마에서 일본 요리사들이 중식을 다양하게 풀어 내는 것을 보고 눈이 확 뜨였다”며 “기존 중화요리의 틀을 깬 퓨전식에 젊은 손님들의 호응이 특히 높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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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30’의 대표메뉴 버크셔K 동파육. [사진 By 30]

‘다양한 술과 함께 즐기는 중식’이라는 콘셉트를 한국전통주와 함께 풀어 내는 곳도 있다. 논현역 인근 중식 레스토랑 ‘By 30’은 지난해 10월 오픈 때만 해도 전통주에 이탈리안 요리를 곁들이는 곳이었지만 지난 4월 대대적인 개편을 했다. 우리 술과 즐기기에 중식이 더 캐주얼하다고 판단해서다. 문배술·삼해소주 등 전통주 16종에 맞춰 동파육·팔보채 등 중국요리 10여 가지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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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키친을 통해 요리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By 30’. [사진 By 30]

윤준영 대표는 “버크셔K(고급 돈육 중 하나) 등 특화된 식자재를 쓰고 요리를 1인용 접시에 플레이팅 하는 등 중식 소비자의 고급화된 눈높이에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총 30석 정도의 아담한 이 공간에서 눈에 띄는 건 중식당에서 이례적인 오픈 키친이다. 두터운 기름 웍을 돌리며 불과 싸우는 셰프의 모습을 다찌(좌석 바)에서 지켜볼 수 있다. 윤 대표는 “쿡방(요리하는 방송) 덕분에 손님들이 조리 과정 보는 걸 좋아하게 됐다”며 “셰프가 움직이는 주방을 일종의 무대처럼 구성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술 위주로 즐기는 중국요릿집’은 말하자면 ‘3세대 중식당’이라 할 만하다. 짜장면·탕수육 위주의 중화요리 반점이 1세대라면, 호텔 중식당에서 경력을 쌓은 셰프들이 수준 높은 본토 중식을 선보이기 시작한 레스토랑형 중식당이 2세대다. 이연복 셰프의 ‘목란’, 여경옥 셰프의 ‘루이’ 등이 해당된다.

3세대 중식주점은 2세대 식당들의 성공에 힘입어 출발했다. 화교가 많이 살고 다채로운 중식당이 모여 있는 연희·연남동 일대가 중심지다. 7년 전 ‘띵하우’를 시작으로 ‘홍복’ 등이 오후 5시쯤 문을 열어 심야까지 이어지는 ‘중식 포차’를 선도했다.

특히 코리아나호텔 ‘대상해’에서 명성을 쌓은 왕육성 대표가 지난해 1월 서교동에 문 연 ‘진진’이 기폭제가 됐다. 여기선 짜장면·탕수육 같은 일반 메뉴를 없애고 ‘대게살볶음’ ‘칭찡우럭’ 등 특색 있는 단품 10여 가지로만 승부한다. 고량주는 옌타이(煙臺)고량주만 취급하고 초록색 병 소주 대신 제주도 기반의 ‘한라산’을 낸다. 맥주 마니아들이 높이 평가하는 미국 IPA ‘밸러스트 포인트’도 만날 수 있다. 왕 대표는 “일반 대중보다 미식가들이 선호하는 술을 갖춰서 맛있는 술과 요리를 동시에 즐기게끔 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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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남동 중식주점 ‘진가’의 청증(칭찡)활우럭.

‘진진’의 성공은 또 다른 스타 셰프들의 참여를 몰고 왔다. 지난해 12월 오픈한 ‘진가’는 SBS플러스의 요리프로 ‘강호대결 중화대반점’ 등에서 지명도를 높인 진생용 셰프가 오너셰프다. 올 초 문을 연 ‘건일배’는 ‘목란’의 이연복 셰프가 메뉴를 컨설팅해 줬다. 이미 JTBC ‘냉장고를 부탁해’ 등 ‘쿡방’을 통해 다채로운 중식의 세계가 조명된 터라 유행에 민감한 젊은 층은 이 같은 중식주점 투어를 트렌드로 즐긴다.

심지어 요리 경력 없이 분위기와 아이디어만으로 젊은 감각을 사로잡은 곳도 있다. 이른바 ‘샤로수길’로 불리는 서울대입구역 인근 뒷골목 주택가에 자리 잡은 ‘몽중인’은 총 좌석수 16석 정도로 작은 주점인데 저녁마다 대기 손님이 줄을 잇는다. 짙은 청록색 문과 타일을 이어 붙인 테이블 등 홍콩 영화 느낌이 물씬한 이곳에선 쓰촨식 중식에 ‘고량주 하이볼’이라는 독특한 조합을 내놓는다.

1986년생 동갑내기인 장원준·정광은 공동 대표는 “중국 여행을 하면서 영감 받은 것들로 차린 주점”이라며 “어떤 정통을 따르기보다 내가 먹고 싶은 스타일의 중식을 한다”고 말했다. 고량주 베이스의 칵테일들에선 완성되지 않은 젊음의 투박한 맛이 배어 나왔다. 이 젊음이 국내 중식 변화의 최전선에 있다.

음식상식 마라탕의 맵고 얼얼한 맛은 쓰촨 초피 때문

마라탕은 중국 쓰촨(四川) 지방에서 유래된 일종의 샤브샤브다. 각종 고기·채소·당면 등 재료를 냄비에 한데 넣고 끓여 내는데 혀가 얼얼할 만큼 매운맛이 특징이다. ‘마라(麻辣)’란 중국어로 ‘맵고 얼얼하다’는 뜻. 화자오(花椒)라고 불리는 쓰촨 초피(椒皮)가 이 매운맛의 주역이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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