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규 <시인·한양대교수>|고은『만인보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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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80년대 중반기의 우리 시단에서 고은만큼 왕성한 생산력을 보여준 시인은 없을 것이다. 지난 2년간1백20여편의『전원시편』을 써낸 바있는 이 시인은 이 달에도 50여편의『만인보·1』(세계의 문학·봄)를 발표하여 우리를 놀라게했다. 장차 3천편 이상을 써서 이 연작시를 완결하겠다고 그는 기염을 토하고 있는데, 분출하는 그의 정력으로 보아 실현성이 없는 큰소리는 결코 아닐 것같다.
시집 한권 분량의 이 연작시에서 시인은 자기가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알게 된 모든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연작시라고 하지만 작품 하나하나가 독립된 시로 읽혀진다. 요즘 유행하는 장시들과는 달리 지루한 느낌을 주지않고 단편적인 서정시의 신선한 매력을 발산한다. 아버지·어머니·할아버지·외할머니·고모부등 가까운 가족이나 친척으로부터 시작하여 애꾸양반, 또 섭섭이, 땅군, 도선이등 동네 사람들을 거쳐 문둥이, 기생들, 강도들, 그리고 고주몽, 이동휘, 이인직등 역사의 인물에 이르기까지 헤아릴수 없이 잡다한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민족의 형상화」라는 시인의 의도를 상당히 구체적으로 실현해준다.
물론 서사시와 같은 유기적 구조를 가지고 있지는 않으므로 작품들 사이에 시적자아의 관점이 상치되는 경우도 더러 눈에 띈다. 예컨대『혈의 누』에서는 신소설의 선구자가 이완용의 비서겸 통역으로 매도되고,『관묵이 아저씨』에서는 구두쇠 노릇을 해서 모은 재산(놋그릇)을 일체의 공출로 모두 빼앗기는 아이러니가 나타난다. 이러한 부정적 시각이『곽낙원』이나『의병 정용기』에서는 민족의 투사들에 대한 긍정적 예찬으로 바뀐다. 『사정리 할아버지』처럼 당당한 선인의 풍모를 노래한 작품이 있는가하면, 민중의 과장된 상투형을 보여준『머슴 대길이』같은 것도 있다.
그러나 이처럼 서로 어울리기도 하고 서로 어긋나기도 하는 형상과 관점의 공존이야말로 도식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을 정직하게 복합적으로 표현한 결과라 할수 있다.
소 눈
멀뚱멀뚱한 눈
외할머니 눈
나에게 가장 거룩한 사람은 외할머니이외다
햇 풀 뜯다가 말고
서 있는 소 아 그 사람은 끝끝내 나의 외할머니가 아니외다
이 세상 평화이외다
죽어서 무덤도 없는
-『외할머니』-
순하디 순한 소의 큰눈이 외할머니의 눈을 연상시키고 그 푸근했던 품속을 생각나게 한다. 돌이켜 보면 가장 거룩한 사람, 아니 평화 그 자체였던 분이다. 소가 죽어서 모든것을 사람에게 다 바치듯 외할머니도 그러한 사랑을 베풀었다. 「소」와「외할머니」와「평화」 를 소박하게 연결시킨 이 작품은 개인적인 구체성을 빌어서 총체적 보편성을 노래한 예라 할수 있다.
모든 대상을 시로 변용시킬수 있는, 그리고「못 견디도록 시가 자꾸 씌어지는 그런」원숙한 시인의 솜씨를 『만인보』 시편들은 실로 폭넓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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