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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조선업 부도 닥쳐야 구조조정, 일본은 미리미리 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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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바리조선소는 일본 조선업계를 통틀어 16년 만에 신규로 선박 건조설비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지난해 밝혔다. [사진 십포토 홈페이지]

일본 조선업은 대표적인 구조조정 실패 사례로 꼽힌다. 버블 붕괴로 1980년대부터 이상 조짐이 감지됐음에도 한참이나 구조조정을 미루다 90년대 후반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구조조정을 시작했다. 그나마도 정치권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면서 획일적인 통폐합이 반복됐다. 게다가 저부가가치 벌크선 위주로 산업이 재편되면서 대규모 컨테이너선과 해양플랜트 분야의 경쟁력을 잃었다.

이마바리는 중소 조선사 인수
히타치·스미토모도 합병 또 합병
수주잔량서 한국 거의 따라잡아
80년대 정부가 주도할 땐 실패
지금은 기업이 자발적 상시 혁신
인원 감축 적어져 노조도 협조

그랬던 일본의 조선업이 부활의 날개를 펴고 있다. 세계 조선·해운 분석기관인 클라크슨리서치에 따르면 세계 3위인 일본의 6월 말 기준 수주잔량은 2210만 CGT(표준화물 환산톤수)를 기록하며 세계 2위 한국(2508만 CGT)을 근소한 차로 추격했다. 한국의 조선업은 99년 일본을 앞지른 뒤 빠르게 격차를 벌렸는데 이제 그 차이가 2003년 이후 최저 수준까지 좁혀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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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까지도 크고 작은 구조조정이 끝없이 반복됐다. 2002년 히타치조선과 JFE가 합병해 유니버설이 탄생했고, IHI와 스미토모중기계를 통합해 ‘IHI머린유나이티드’를 설립했다. 그리고 2013년 이 두 회사는 다시 합병한 끝에 지금의 ‘재팬머린유나이티드’가 탄생했다. 현재 일본의 최대 조선사로 성장한 이마바리는 90년대 이후 쏟아져 나온 하시조우(2001년)·와타나베(2005년)·신카사·고요(2014년)·다도쓰(2015년) 등 중소형 조선을 연이어 흡수하며 덩치를 키웠다.

LG경제연구원의 이지평 연구원은 “산업 재편을 마친 일본 조선사들이 그동안 약점으로 지적됐던 해양플랜트·LNG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 기술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이마바리는 지난해 400억 엔(약 4600억원)을 투입해 신형 대규모 선박 건조설비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연구원은 “한국이 주도했던 대형 컨테이너 선박 시장 개척에 나선 것이라며 일본 조선사가 새로운 건조설비를 짓는 것은 16년 만의 일”이라고 강조했다.

조선업 이외에 철강·정유·전자업종에서도 구조조정은 진행되고 있다. 특히 일본의 구조조정은 지금 한국 경제처럼 저성장 국면에 진입하면서 시작된 까닭에 우리가 눈여겨볼 점이 많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일본은 산업 단위의 굵직한 구조조정을 통해 다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충실히 닦았다. 일부 전문가와 기업이 일본의 구조조정을 실패 사례로만 언급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일본은 큰 틀을 바꿔 좋든 나쁘든 결과를 만드는데 한국은 파산 직전에 몰린 기업에 돈을 쏟아부으면서 ‘구조조정’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미즈호은행의 야마오카 겐이치 산업조사부 총괄은 “최근 일본의 구조조정은 자발적·효율적·선제적 세 가지 특징이 있다”고 설명했다. 80~90년대 구조조정이 정부의 주도로 진행된 톱다운 방식이라면 지금은 기업이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무조건 생산 능력을 줄이기보다는 기업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방향의 통폐합이 이뤄진다.

예컨대 A기업과 B기업을 합병할 때 과거에는 두 기업의 생산 규모를 가장 많이 고려했다면 지금은 두 기업이 가진 강점과 약점을 파악해 시너지를 내는 방향을 고민한다. 또 기업이 파산상태에 이르기 전 여유가 있을 때 상시 구조조정이 진행돼 체계적으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는 게 야마오카 총괄의 설명이다. 한국이 ‘실패’로 단정 지었던 과거의 경험을 살려 ‘진화된’ 구조조정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선제적 구조조정은 노사 관계의 신뢰를 만들기도 한다. 국제경제 전문가인 우기훈 한국외대 교수는 “기업은 지속적으로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노조는 큰 반발 없이 협조해 비교적 순탄하게 구조조정이 이뤄진다”고 말했다. 일본의 기업은 재정적인 여력이 있는 상태에서 구조조정에 들어가 비교적 인력 감축의 폭을 적게 가져간다. 회사 측에서 최대한 고용을 보장하려는 의지를 보이기 때문에 노조도 회사 일에 적극 동참하는 선순환구조가 만들어졌다는 게 우 교수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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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일본의 구조조정에 배울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산업 전체를 재편하는 방식의 구조조정은 컨트롤타워가 상황을 잘못 판단했을 때 시장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성 교수는 또 “세계 경제가 급변해 미래 상황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대응하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개별 기업 단위의 구조조정이 더 낫다”고 덧붙였다.

이지평 연구원은 “구조조정은 단기간에 이뤄져야 효과를 볼 수 있는데 일본은 지나칠 정도로 완만하게 구조조정이 진행된 게 약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본 기업은 사람을 적게 해고하는 대신 사람을 더 뽑지 않고 자연적으로 인원이 줄어들게 유도하는데 이런 방식으로는 큰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다. 기업이 고용을 줄이면 청년 실업이라는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고 강조했다.

박성민·김유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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