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어르신과 어울려 그린 골목 벽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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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월메이드 허창주 대표
전국 낙후된 마을 50곳 새 단장
주민 설득에만 석 달 걸리기도
“위안부 할머니들 벽화도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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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창주 씨는 “벽화 작업은 주민들 스스로 자신의 동네에 자부심을 갖게 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사진 송봉근 기자]

착시현상을 불러와 차량 속도를 줄이게 하는 서울 신촌의 횡단보도, 연한 파스텔 빛으로 채색된 인천 절골마을 골목, 경남 창원의 창원초등학교 담벼락 등. 개성 있는 그림이 입혀진 이 장소들은 모두 허창주(38) 대표가 운영하는 사회적 기업 ‘월메이드(WallMade)’의 손길로 탄생했다. 그는 낙후된 마을을 공공미술 작업으로 되살린다. 그동안 그가 새롭게 탄생시킨 마을은 전국에 50곳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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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였던 그는 2012년 월메이드를 설립했다. “외국에 나가 보니 자기 동네에 자부심을 갖고 사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그라피티 같은 거리 예술로 유명해진 뉴욕 브루클린이나 중국 베이징의 789거리가 그런 곳이에요. 왜 한국에서는 집값 비싼 곳에 사는 사람들만 동네에 자부심을 갖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월메이드 설립 후 그의 첫 작업은 서울 강남역 근처 낡은 옹벽에 벽화를 그리는 일이었다. 형형색색의 바지를 입은 다리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그린 벽화는 하루에도 몇 번씩 벽화 앞을 지나는 주민들로부터 금세 호평을 받았다.

그는 벽화 작업에 주민들을 참여시키는 방안을 고민했다. “벽화를 잘 그리려면 전문가 몇 명이 모여 뚝딱 하면 돼요. 하지만 제가 그린 벽화는 대부분 낙후 지역에 있습니다. 벽화의 가장 큰 의미는 지역을 되살리는 과정에 주민이 참여하고 그로 인해 동네에 대한 자존감을 회복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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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절골마을의 벽화. [사진 송봉근 기자]

‘모든 주민이 참여한다’는 철학을 관철시키려다 보니 주민 설득 시간이 정작 벽화 작업보다 오래 걸리는 경우도 많았다. 지난해 작업했던 인천 절골마을 프로젝트가 그렇다. ‘달동네’처럼 지대가 높고 이곳저곳 낡은 마을에는 대부분 고령의 노인들이 살고 있었다. “멀쩡한 담벼락에 왜 그림을 그리겠다는 거냐는 반응이 많았어요. 벽화를 그리는 것부터 그 작업에 참여하는 일까지 모두 귀찮고 해괴한 이야기로 들렸던 거죠.”

그는 마을 통장처럼 가가호호 찾아다니며 어르신들을 설득했다. 도안을 여러 개 준비해 “동네가 이렇게 변합니다. 옆집 어르신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친해지실 수도 있고요”라는 말을 수도 없이 했다. 설득에만 석 달이 넘게 걸렸다. 결국 대부분의 어르신이 작업에 참여했다. 그렇게 벽화가 완성된 후 무뚝뚝하던 어르신들은 “마을이 이렇게 변할 줄 몰랐다. 고맙다”고 말했다.

주민과의 공감 속에 벽화를 그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을을 보다 쾌적한 곳으로 가꾸게 된다. “ 벽화를 그리다가 담 앞의 쓰레기를 치우거나 부서진 담벼락을 메우는 경우가 많아요. 한 번 그런 경험을 하면 계속 동네에 애정을 가지고 가꾸게 됩니다.” 그의 다음 목표는 벽화에 위안부 할머니 등 사회적 메시지와 서민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는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벽화처럼 우리가 잊고 살았지만 꼭 기억해야 할 이야기들을 담고 싶어요. 삶의 이야기가 살아 있는 벽화마을을 전국에 만들고 싶습니다.”

글=김나한 기자 kim.nahan@joongang.co.kr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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