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서천석의 내 마음속 몬스터] 친절한 은경씨 vs 냉담한 엄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10면

기사 이미지

남에겐 ‘나쁜 사람’으로 비춰질까 노심초사
약자인 아이에겐 마음 속에 쌓인 화 쏟아내
자기 주장 확실하게 내세워야 응어리 풀려

기사 이미지

『내 친구 다머』2014년 앙굴렘 국제만화 페스티벌 ‘올해의 발견 작가상’ 수상작. 최악의 연쇄살인범 제프리 다머의 우울했던 어린 시절을 다뤘다. 왼쪽 그림은 이 책 속의 삽화. 미메시스, 1만 6800원.

창간호부터 함께 해온 인기 칼럼 ‘윤대현의 스트레스 클리닉’에 이어 새로운 힐링 칼럼 ‘서천석의 내 마음속 몬스터’를 시작합니다. 분노, 질투, 외로움, 조바심…. 나를 스스로 괴롭히며 상처를 주는 내 마음속 몬스터들입니다. ‘서천석의 내 마음속 몬스터’를 통해 내 안의 몬스터를 발견하고 이해하며 화해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봅니다.

“왜 이렇게 화가 많이 나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나 자신이 싫고 그런데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이런 말을 하며 괴로워하는 은경씨는 실제로는 화를 거의 내지 않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가 순하고 남에게 잘 맞춰주며 늘 미소로 상대방에게 대하는 사람이라고 평한다. 그 역시 자신이 남들과 잘 지내고 있으며 사회생활에 무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만 그는 아이에게는 화를 종종 낸다. 무력하고 약한 존재인 아이를 화풀이 대상으로 삼고 있다니. 이런 자신을 용납하기 힘들고 자책감에 빠질 때가 많다. 그럼에도 아이에게 또다시 쉽게 화를 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아이에게만 화를 내는 이유가 뭘까. 아이는 자신보다 힘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라는 존재가 끊임없이 부모의 신경을 자극한다는 이유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화를 내는 진짜 이유는 현재 상황을 내가 쉽게 통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때다. 화를 내서 상황이 더 통제하기 어려운 지경으로 흘러가거나 아무런 발전이 없을 거란 판단이 든다면 우리는 화를 내지 않는다.

예를 들어보자. 도로에서 앞 차 운전자의 미숙함 때문에 사고날 위험에 여러 차례 처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차 문을 박차 내린 순간, 앞 차에서 위협적인 표정을 한 거구의 남자가 내렸다. 이 순간 우리는 화를 내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분노는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에서 사용하는 의사소통 방법이다.

은경씨의 경우, 분노로 의사를 전달하고 있지만, 이 방법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무엇보다 죄책감 때문이다. 그는 선한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들에겐 사용하지 않는 분노를 무력한 아이에게는 사용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스스로 느끼고 있다. 게다가 아이는 둘도 없이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다. 그런 아이를 향해 모질게 화를 내는 건 온당치 못하다. 더군다나 자신이 아이의 정신 세계에 트라우마를 남기고 미래를 어둡게 만들지는 않은지 걱정도 된다.

혹시 은경씨가 아이에게 화를 내는 게 엄마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아니다. 은경씨의 엄마는 오히려 기운이 없고 자주 아팠다. 권위적이던 아버지 옆에서 엄마는 늘 무기력했다. 어린 시절, 은경씨가 집안의 에너지원이었다. 아픈 엄마를 돕기 위해, 무서운 아버지로부터 엄마를 보호하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 모두를 만족시켜야 안정적인 가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은경씨에게 안정감이란 '내가 받는 사랑의 최대치'라 정의한다. 은경씨는 그렇게 최선을 다했고 그래서 모두가 은경씨를 좋아했다. 다만 요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노력하는 은경씨에게 누구도 먼저 사랑과 인정을 주지는 않았다.

아이는 은경씨가 지금껏 만난 수많은 타인의 모습과 같다. 작은 것을 주고 많은 것을 요구한다. 애쓰고 노력해서 만족시켜야 한다. 그래야 평화와 행복과 미래가 보장된다. 아이는 또 타인과 다른 점이 있다. 너무도 약한 존재여서 은경씨에게 사랑과 안정감을 줄 가능성이 적다. 사랑과 안정감은 나만 제공하고, 아이에게 기대할 수 없다. 이는 기본적인 공정함에 어긋나는 것이다. 은경 씨는 지금까지도 늘 손해 보는 장사를 해왔지만 분명한 약자인 아이 앞에서 서자, 이거야말로 확실한 손해란 사실을 깨닫게 됐다.

은경씨는 늘 자신만 손해를 보고 살아온 것에 화가 난다. 나도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존중 받고 이해 받고 싶다.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느꼈기에 어릴 때부터 남들을 만족시키려 노력해왔다. 그런데 이 아이는 나에게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 내가 바라왔던 삶을 아무 노력없이 뻔뻔하게 누리고만 있다.

이렇게 질투의 감정까지 얹히자 부당함에 대한 분노는 더 불 붙는다. 하지만 현명하고 선한 은경 씨는 안다. 아이가 옳고 자신이 틀린 것이다. 현재의 아이가 맞고 과거의 자신은 잘못 살아온 것이다. 돌이킬 수는 없다. 그래서 더 화가 치민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노가 몬스터다. 시도 때도 없이 아이에게 터지고 마는 화가, 스스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분노의 감정이 몬스터다. 하지만 모든 감정에는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 슬픔도 두려움도 외로움도 질투도 그리고 분노조차 필요하기에 인간의 유전자 속에 살아남았다. 인류학 연구를 보면 말이 한 마디도 통하지 않는 서로 다른 문명권의 사람끼리도 표정만으로 상대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감정은 보편적이다.

분노의 기능은 불편한 감정을 전달하는 데 있다. 상대방의 행동에 불쾌감을 느껴 공격하고 싶을 때 우리는 화를 낸다. 화를 통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싸움을 할 수 있는 상태로 준비시키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도를 전달한다. 반대로 상대가 화가 났다고 느끼면 우리는 빠르게 대응한다. 같이 맞서 싸울 수도 있고 아니면 적당히 물러나기도 한다. 아이들은 부모의 눈치를 보고 빠르게 움직이고, 부부끼리도 말조심을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차분하게 말로 전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 해결의 신속성 면에서 분노는 이성적인 대화와 비교할 수 없이 우월하다.

은경씨는 불편한 감정을 늘 마음에 묻어두고 살아왔다. 상대가 요구하기 전에 먼저 움직이고 배려했던 건 두려웠기 때문이다. 분노는커녕 단순한 표현만 해도 상황이 엉망으로 흘러갈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이렇게 먼저 움직인 은경 씨에게 부모는 그저 만족했고 마음의 여유나 배려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은경 씨는 ‘좋은 사람’으로 커왔다. 자기가 바라는 것을 말해야 하고 때로는 화도 내야 하는데, 그렇다고 ‘나쁜 사람’도 아니고 상황이 엉망이 되는 것도 아닌데 은경씨는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처음으로 화를 내고 있는 거다.

미숙한 것들은 보기에 썩 좋지 않다. 눈살이 찌푸려진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제대로 걷고 달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은경씨는 아이에게 화내는 것을 멈추려 노력할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좀더 자신을 주장해야 한다. 은경씨 주변의 수많은 타인들에게 버림받을까봐, 상황이 엉망이 될까봐 걱정에 사로잡혀 아무 것도 못하는 약한 존재로 살아선 안된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면 처음에는 어색할지 모른다.

남들은 "갑자기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변했지" 싶을 것이다. 어쩌면 일부는 정말로 더 이상 은경씨를 좋아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은 그냥 떠나보내야 한다. 그래야 정말 소중한 사람을 제대로 옆에 둘 수 있다. 그때가 되면 은경씨는 이유없이 아이에게 화를 내는 엄마가 아닐 것이다. 아이를 제대로 사랑하고 자신도 제대로 사랑받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을 거다.

서천석 1969년생. ‘아이와 부모의 마음을 잘 다독여주는 의사’로 유명하다. 서울대 의대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마음의 병의 뿌리는 어린 시절에 있다’는 걸 깨닫고 소아청소년정신과 의사가 됐다. 『그림책으로 읽는 아이들 마음』 『우리 아이 괜찮아요』 등 육아 분야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서울신경정신과 원장이자 행복한아이연구소 소장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