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소는 성역 없는 상하 ˝대화의 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조선조가 망할 무렵 조선왕조 5백년의 제도를 연구하던 어느 외국인 학자가 읽던 책을 덮으며 탄식했다고 한다.
『이렇게 훌륭한 제도를 가진 나라가 어떻게 망할 수 있단 말인가.』
상소제도를 두고 한 말이다. 최근 상소제도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쏠리고 있다. 목숨을 걸고 할말을 다했던 옛 선비들의 기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일고 있다. 명 상소문을 소개하는 책들도 선보이고 있다.
상소문이란 한마디로 임금께 올리는 글. 그 유래는 중국 진나라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설에는 황제의 위엄 앞에선 신하의 심회를 죄다 말할 수 없으므로 부득이 글로 써서 아뢰게된데서 비롯됐다고도 한다.
상소문은 정치·경제·국방·풍속· 종교·예제 등 국정 전반에 걸쳐 거론됐으며 억울한 누명을 쓴 죄수로부터 지방의 유생들,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현직관료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다 올리게 돼있었다. 따라서 상소문은 당시 사회상과 정치풍토를 한눈에 보여주는 구실도 한다.
최근 명 상소문을 모아 『상소』 란 책을 펴낸 이전문씨(한문학자)는 『상소의 현장이야말로 「성역」이 없는 상하대화의 광장이었다』고 말한다. 상소를 통제하면 언로가 막히고 언로가 막히면 나라가 망한다하여 상소를 장려했다고 한다. 상소자가 아무리 뼈아픈 소리를 해도 여간해선 벌주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고 절대로 언근, 즉 말의 출처를 캐지 않았다.
또 이보다 앞서 『상소문』이란 책을 펴낸 김영률씨(한문학자) 또한 『상소문을 읽으면 바로 우리시대와 가장 가까왔던 조상들의 얼굴모습을 보게된다』고 말한다.
우리가 명 상소문을 접하면서 강렬하게 느끼는 것은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언로를 중히 여겼는가 하는 점이다. 그들은 또 직언을 위해선 스스로의 목숨도 내던지길 주저하지 않았다.
조선 초기의 문 신 이지는 『나무는 먹줄을 퉁겨야 바르게 자를 수 있고, 임금은 직언을 따라야 성스럽게된다』면서 임금이 직언 하는 신하를 가까이 둘 것을 호소했다. 누가 상소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으나 『언로가 넓으면 천하의 착한 이들이 모두 모이고 이들이 모이면 국가의 소유가 된다』면서 언로야 말로 임금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는 좋은 길이라고 강조하는 글도 보인다.
조선 숙종 때의 문신 허목은 『옛날 진시황은 천하가 자기에게 복종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해 말을 함부로 못하는 법을 세우고 자기를 비판하는 자를 모조리 죽였지만 진나라는 2대만에 망함으로써 세상의 웃음거리가 됐다』면서 『백성이란 죽일 수는 있어도 이길 수는 없다』는 글을 올리고 있으며, 조선 연산군 당시의 문신 박처륜은 『임금이 마음을 탁 터놓고 모든 말을 다 받아들인 뒤 과연 정직한 말이면 상을 내린다해도 속말을 다할 수 없는 형편인데 위엄으로 겁주며 싫어하는 기색이 있다면 누가 임금의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해 화를 받으려 하겠는가』고 반문하고 있기도 하다.
일반국정에 대한 비판도 대쪽같다.
고종 때의 문신이며 의병장이었던 최익현은 『재물이 모이면 백성이 흩어지고 재물이 흩어지면 백성이 모인다』고 했으며 어떤 이는 『국가를 망치는 간사한 자들은 역적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써 올렸다. 결국 자기의 뜻을 성취하고 나라를 망치게 한다는 뜻이다.
또 어떤 이는 『용렬한 자들이 벼슬에 승진되니 난을 불러일으킬 조짐』이라 했고 『백성의 재물을 긁어내는 신하보다 차라리 도둑질하는 신하가 낫다』고 한 이가 있는가 하면 홍문관에선 『모든 사람들이 관직을 얻기에 요행수를 바라고 있다』고 상소하기도 했다. 평안도 용천의 15세난 기생 초월은 『신하는 강도가 되고 백성은 어육이 돼 바야흐로 도탄에 빠져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근심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상소제도만이 언로의 전부는 아니었다. 목정균교수(수원대·신문방송 학)가 중종 당시의 언로 상황을 연구한 바에 따르면 임금에 대한 의사 전달 량 중 상소 등 문자전달이 차지하는 비중은 5·7%에 불과했으며 횟수도 월 평균 5·6회 (약5일에1회 꼴)에 지나지 않았다.
그만큼 경연 등을 통한 대면 직접전달 및 승정원을 통한 구두 간접전달방법이 왕성하게 쓰였다는 얘기다. 이는 조선조 언로의 폭과 깊이를 말해 주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
학자들은 비록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달리한 시대를 살고 있다 하더라도 이들 조상들과 정신적 맥락이 닿아있음을 느끼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근성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