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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海 문제’로 전선 너무 넓어져 부담, 수위조절 나설 수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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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2호 3 면

지난 6일 필리핀 마카티의 중국 영사관 앞에서 필리핀과 베트남 주민들이 “중국은 판결을 존중하라”?침략을 중단하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항의하고 있다.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은 법적 근거가 없다’는 중재재판소의 판결 이후 중국은 이를 거부하며 해상 무력 시위를 계속했다. [AP=뉴시스]

2016년 여름,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긴장이 팽팽하다. 지난달 12일 헤이그 유엔해양법협약 7부속서 중재재판소가 필리핀이 낸 중국과의 남중국해 분쟁 소송에서 ‘중국 완패’ 판결을 내린 이후다. 남중국해의 90%를 자국 영해라 주장하며 완력을 휘둘러 온 중국의 행태에 국제사회가 ‘국제 규범을 준수하라’고 명령을 내린 셈이다. 갈등 조정의 잣대를 제시해 준 판결이지만 중국의 여론전과 ‘판결 무력화’를 노린 군사행동으로 역내 긴장은 더 커지고 있다. 불씨는 일본이 실효 지배하고 있는 동중국해의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로까지 튀고 있다.


중국이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계획을 밝힌 한국에 대해서도 거친 대응으로 일관하면서 아·태 지역이 신흥 패권 중국과 기존 패권 미국의 ‘신(新)냉전 지대’가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사드 문제로는 한국과, 남중국해를 둘러싸곤 필리핀·베트남 등 동남아 주변국과 무차별적으로 부딪히고 있는 중국의 창끝은 미국을 겨냥하고 있다.


중재재판소 판결의 핵심은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이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이 자국 관할권에 있다고 주장하는 분쟁 ‘지형물’이 사람이 거주하는 섬이 아닌 암초 또는 간조 노출지(썰물 때만 수면 위로 올라오는 바위)로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EEZ)이나 대륙붕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또 이 지형물 주위를 매립해 인공섬을 만든 중국의 행위는 유엔해양법협약(UNCLOS) 위반이라고도 했다.


필리핀이 국제해양법재판소(ITLOS)에 제소할 때부터 중재재판소의 관할권과 구속력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천명해 온 중국은 판결 자체를 전면 부정했다. 판결 이전부터 남중국해 일대에서 군함 100여 척, H-6K 등 최신예 전략폭격기를 동원해 군사훈련을 벌였고, 판결 이후엔 남중국해의 군사 통제센터 역할을 하는 하이난다오(海南島) 해상 등에서 대규모 무력 시위를 벌이고 있다. 동중국해의 센카쿠 열도 접속 수역(12~24해리)에도 해경 선박과 어선 수백 척을 투입해 일본과 연일 외교전을 치르는 중이다.


남중국해는 세계 물동량의 3분의 1이 넘는,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바다다. 한국의 원유 수송선의 90%가 이곳을 지난다. 358만㎢ 해역에 스프래틀리제도(중국명 난사군도·南沙群島), 파라셀제도(시사군도·西沙群島), 프라타스제도(둥사군도·東沙群島), 메이클스필드제도(중사군도·中沙群島) 등 4개 군도를 중심으로 섬과 산호초, 바위가 280여 개 산재해 있다. 중국은 이 군도 바깥, 베트남 앞바다와 말레이시아 북부 및 필리핀 서부 해역을 좁게 남겨 두고 9개의 선을 U자 형태로 연결해 ‘구단선(九段線·Nine Dash Line)’이라 부르고 자국 영해라고 주장한다. 남중국해 면적의 85~90%에 이른다.


중국이 남중국해 영유권을 주장하며 내세운 대표적 단어는 ‘자고 이래(自古以來)’다. 한(漢)나라 이전부터 가장 먼저 발견해 이름을 붙이고 관리해왔다는 주장이다. 중국이 한국·베트남 등 접경국 14개 나라와의 국경선, 바다 영유권 등을 주장하는 지침서로 만든 『중국 근현대 영토 문제 연구』(劉恩瑞·劉惠瑞, 2007년 공산당 상하이시 당교)는 ‘진(秦)시황제 33년에 최초로 남중국해를 행정 관리했다’고 소개한다. 1974년 베트남에서 가까운 시사군도를 무력 점거한 이후 남중국해에 면한 동남아 국가들과 줄곧 부딪혀 왔다. 80년대 중반 1도련선, 2도련선 개념을 만들어 해양강국 건설에 나선 중국은 2012년 ‘중국을 해양 국가로 키워야 한다’는 후진타오의 제18차 당 대회 연설 이후 팽창의 길을 걷고 있다(이춘근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 2012년 2월 중국은 어업 문제로 필리핀이 실효 지배해 온 프라타스제도의 스카보로 사주에서 대치하다 암초를 무력 점거했고, 2014년엔 시사군도 인근 해역에 석유 시추선을 박아 베트남과도 충돌했다.


역내 갈등의 성격이 군사·안보로 변한 건 2015년 초. 미국의 한 싱크탱크가 스프래틀리제도의 암초가 인공섬으로 매립되고 그 위에 활주로와 격납고 등 군 시설물이 지어진 사실을 고해상도 인공위성 사진으로 파악하면서부터다. 2011년 주창한 ‘아시아 중시(Pivot to Asia)’ 정책을 중동 다음의 문제로 물려놨던 미국은 그해 5월 남중국 공해에서의 자유 항행 작전(Free Navigation Project)을 천명하며 항모를 투입했다. 중국은 해역 내 군사력 증강으로 맞섰다. 이후 베트남은 미국의 무기를 구매하고 깜라인만 개방도 고려하고 있다. 25년 전 미군을 내보낸 필리핀은 수비크만으로 미군을 다시 부르는 문제를 고려하는 등 동남아 지역 안보 협력도 재조정되는 상황이다.


남중국해는 중국의 굴기가 계속되는 한, 지금의 미국이 그 영향력을 지속하는 한, 아·태 지역의 잠재적 화약고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 시대 중국 부활의 상징인 ‘일대일로(一帶一路·One Belt One Road)’ 프로젝트 성공을 위한 핵심 통로이고, 미국 입장에선 이 해역이 중국의 팽창 저지에 초점을 맞춰 내세운 ‘아시아 중시 정책’ 의 최전선이란 점에서다. 두 나라 모두 물러설 수 없는 ‘전략 해역’이다.


해안선 길이 1만8000㎞. 15세기까지 최강 해양 국가로 군림하던 중국은 근세 들어 바다를 제패한 서구 열강과 일본으로부터 ‘치욕의 100년’(1840~60년 아편전쟁 이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때까지)을 겪었다. 침략 루트는 바다였다. 역사적 상처가 공격적 해양 정책으로 나온다는 분석도 없진 않으나 바다 분쟁에 임하는 중국의 행태는 다분히 위협적이고 패권적이다.


남중국해 판결과 사드 이슈를 놓고 과도하게 반응해 온 중국이 머지않아 수위 조절에 나설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남중국해 관련국과의 과도한 정치·군사적 긴장 상황이 일대일로 프로젝트 성공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중국 지도부가 모를 리 없는 데다, 내년 가을 19차 당대회를 앞두고 현재 중국이 펼쳐 놓은 전선(戰線)이 너무 확대돼 있다는 분석에서다. 박병광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동북아연구실장은 “국내 경제가 좋지 않은데, 대외적으론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센카쿠), 황해(사드), 대만(민진당) 등 이른바 ‘사해(四海) 문제’와 싸우고 있다”며 “점진적으로 상황을 수습해 나갈 것”이라고 진단했다. 박 실장은 “사드 문제도 ‘한반도 배치 계획 철회’라는 목표를 포기하진 않겠지만 한국과 파국을 맞는 상황은 만들지 않을 것 같다”며 “9월 초 항저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주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 정부는 G20 정상회의를 잘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신성원 국립외교원 경제통상연구부장은 “중국은 긴 시간표로 움직이는 만큼 조만간 냉정 모드로 돌아설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 무대에서 사실상 ‘망신’을 안겨준 필리핀과 대화 자체를 외면하던 중국은 12일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의 특사인 피델 라모스 전 대통령과 푸잉 전국인민대표대회 외사위 주임과의 회담을 통해 “남중국해 긴장 완화를 위한 대화 필요성에 합의했다”는 공동성명서를 냈다.


김수정 국제선임기자kim.su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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