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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응원 바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92호 34면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던 것일까. 한동안 연락이 없던 안다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득아, 혹시 일본드라마 ‘중쇄를 찍자’ 봤어?


처음에 나는 형의 발음 때문에 중세시대와 관련된 역사물인가 생각했다. 못 봤습니다만 갑자기 ‘일드’는 왜?


내가 요즘 그럴 때가 잦은 편이야. 보고 들은 것인데 그래서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인데, 내가 누구야? 안다 아니냐, 그런데도 막상 그것을 말하려고 하면 생각이 나지 않아. 얼마 전 어떤 바람에 대한 인상 깊은 이야기를 알게 되었어. ‘어떤 바람’이라고 한 것은 바람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서고 ‘알게 되었다’라고 한 것은 내가 그것을 본 것인지, 들은 것인지, 읽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고.


흥미롭네요. 안다 형이 모르는 것도 다 있고요.


형을 놀리는 거냐. 나는 말한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으로 안다는 것이다. 2500년 전 공자도 나와 같은 말씀을 했지. 내 경우는 모르는 게 아니라 아는데 당최 기억이 안 난다는 거야. TV 퀴즈 프로그램에서 분명 아는 문제인데 기억이 안 나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사람 본 적 있지? 그래, 내가 그런 얼굴로 한나절을 돌아다녔다니까. 아무리 기억해내려고 애써도 끝내 떠오르지 않았어. 누군가 내 기억을 산 채로 쇳덩이에 매달아 망각의 바닷물 속에 던져버린 것일까?


형은 영화나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는 것 같아요.


네 말이 옳아. 사실 기억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이 기억나서 문제야. 책이나 기사에서 읽은 것도 같고, 수없이 많은 SNS에서 본 것도 같고, 어쩌면 광고에서 봤을까, 누군가 보내준 메일이나 문자 메시지에서 본 건지도 모르지, 네 말처럼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것도 같고. 대체 그 바람을 어디서 접한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거야. 그나마 최근에 가장 많이 본 게 ’중쇄를 찍자’라는 드라마거든. 거기서 봤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어서 전화 찬스를 쓴 셈인데. 너도 못 봤다니 실망이구나.


요즘 힘들어서 드라마 같은 거 볼 여유가 없어요. 그런데 그 바람이 대체 어떤 바람인데요? 설명을 들으면 혹시 제가 알 수도 있잖아요.


등산할 때 8부 능선쯤 올라가면 엄청 힘들잖아. 정상은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고, 자신이 어디쯤 와 있는지도 모르겠고, 숨은 가쁘고 기운은 다 빠지고, 이대로 돌아서 내려갈까 포기하고 싶을 때 그때 산꼭대기에서 아래쪽으로 시원하게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이 있대. 그러니까 그 바람은 등반하는 사람들에게 곧 정상이니까 포기하지 말고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보내는 산의 응원인 거지.


교훈적이네요. 드라마를 다시 보면 되잖아요.


그 드라마가 무려 10회나 돼. 한 회가 거의 한 시간이고. 아무리 내가 안다지만 바람 이름 알려고 그걸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보겠나. 사실 그 드라마에서 본 것인지도 확실하지가 않고.


검색해봤는데 그런 바람 이야기는 못 찾겠네요.


그래. 주변에 ‘중쇄를 찍자’를 본 사람 중에도 그 바람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더라고. 아마 다들 지치고 너무 힘들어 포기하려고 할 때 그때 누군가 그 바람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 일으켜 세우는 그런 장면에서 나왔던 것 아닐까 싶은데 말이야.


안다 형의 전화를 끊고 나자 나도 그 바람의 이름이 몹시 궁금했다. 천금 같은 일요일 하루를 몽땅 바쳐 ‘중쇄를 찍자’를 1회부터 10회까지 봤다. 바람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중간에 몇 번 졸면서 봤기 때문에 그때 잠깐 그 바람이 지나간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안다 형에게 전화를 걸어 ‘중쇄를 찍자’를 다 봤지만 바람 이야기는 안 나오더라고 말했다. 형은 내 말에는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득아, 너 혹시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는 봤냐?


그제서야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그런 바람 이야기 같은 건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그 바람은 안다 형이 지친 내게 보내는 격려이고 응원인지도 모른다고. 그러므로 이름이 무엇이든 바람은 가만히 있지 않고 부는 것이라고.


나는 성주 사는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아, 혹시 일드 ‘중쇄를 찍자’ 봤어? ●


김상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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