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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하루 종일 냉방해도 월 13만원”…일본 누진제는 1.4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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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대전시 서구 탄방동의 한 상가 건물에 에어컨 실외기가 빼곡히 설치돼 있다. 전기요금 누진제는 상가(일반용)나 공장(산업용)이 아닌 주택(가정용)에만 적용돼 논란이 커지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지난 9일 일본 도쿄. 12년째 주재원 생활을 하고 있는 윤모(36)씨는 올여름 내내 집에 있는 동안 거리낌없이 에어컨을 켜뒀다. 워낙 더운 지역이라 에어컨이 없으면 생활하기 힘들다. 윤씨는 “지금까지 전기료가 과도하다고 의식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들려오는 ‘전기요금 폭탄’을 일본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다.

미·일 모두 누진제 적용하지만
한국만큼 구간별 요금차 크지 않고
원가연동제로 저유가 땐 값 내려
“시간대별 요금 차등화도 대안”

미국 뉴저지주 레오니아의 단독주택(방 3개, 화장실 2개)에 사는 앤드루(41). 그는 지난해 여름에 집에 있을 때는 종일 에어컨을 틀어 놓았다. 지난해 7월 그가 받은 전기요금 고지서는 122달러(약 13만5000원)였다. 냉방기를 사용하지 않은 같은 해 10월 전기요금(94달러·약 10만4000원)보다 3만원 정도 더 나왔다. 앤드루는 “냉난방을 모두 전기로 하는데, 전기요금이 지나치게 비싸다고 여긴 적은 없다”고 말했다.

기록적인 무더위에도 에어컨을 켜려면 ‘요금 폭탄’ 걱정에 한참 고민해야 하는 한국인의 올여름과 너무도 다른 냉방 풍경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강국 지위에 어울리지 않게 한국인은 여름에 푹푹 찌는 더위를 고스란히 견뎌야 한다. 에어컨 사용을 ‘전기 사치’로 취급하는 한국의 전기요금 제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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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주택용 전기는 누진제가 적용된다. 한국만 이런 건 아니다. 미국·일본도 누진제다. 많이 쓸수록 요금이 올라간다. 그런데 한국인만 요금 폭탄에 전전긍긍하는 건 한국의 누진제가 유독 가파르게 요금을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최저 1단계(57.9원)와 최고 6단계(677.3원) 등급 간 단가 차이(저압 기준)가 11.7배다. 미국은 2단계에 1.1배, 일본은 3단계에 1.4배다.

한국전력 추산에 따르면 한국에서 전기를 월 100㎾h 사용하면 전기요금은 6480원을 낸다. 하지만 500㎾h 사용 시 요금은 11만4580원으로 폭증한다. 일본의 경우 같은 사용량이면 원화 환산 기준 2만6115원에서 12만9612원으로 5배가 뛴다. 사용량에 거의 비례한다. 실제 요금을 덜 내더라도 체감 요금은 한국 소비자가 훨씬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외국보다 전기를 싸게 공급한다”는 정부의 말이 와닿지 않는다.

전기요금 누진제를 둘러싼 여론이 폭발한 이유는 더 있다. 정부는 “여름철 전력 피크(소비 급증)를 막기 위해 누진제를 만들었고 그렇지 않으면 발전소가 더 필요하다”(채희봉 산업부 에너지자원실장)고 하지만 해마다 늘어나는 전력 수요는 산업용이다.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가정용 전력 소비는 6만3794GWh로 2013년(6만3970GWh)과 비교해 176GWh 줄었다. 반면 누진제 적용을 받지 않는 산업용 전력 소비만 8792GWh 증가했다.

8월 말 서민들은 ‘전기요금 폭탄’을 맞을 가능성이 커졌다. 보통 7월 중·하순, 8월 초에 사용한 전력은 8월 말 고지서에 요금으로 반영된다. 폭염이 기승을 부린 이 기간 가정용 전력 사용량은 크게 늘어났다.

누진제가 도입된 1974년에는 에어컨이 직장 월급의 6배를 넘는 ‘사치품’이었다. 지금처럼 전기 소비량이 많은 가전기구가 많지 않았던 시절이다. 하지만 가전업계 추산으로 현재 에어컨 보유 가구 비율은 80%에 이른다.

조성봉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는 “에어컨이 부유층의 전유물이 아닌데도 전기요금 때문에 에어컨 사용을 막고 있는 사실 자체가 요금 제도의 부당함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이런 만큼 시대에 맞지 않는 요금제도를 이참에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조경엽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에너지 절약을 위해서라면 누진제보다는 시간대별 요금 차등화 등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미국이나 중국·일본처럼 원가연동제를 전기요금에도 적용해 저유가에 따른 전기 원가 하락을 요금에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윤한홍 새누리당 의원은 “국내에서는 가스요금, 지역난방 요금, 항공료 등에 연료비 연동제를 시행 중이다. 건전한 전력소비 정착을 위해 전기요금에도 원가연동제 도입을 적극 검토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전기요금 급등 가능성을 우려한다. 하지만 일본처럼 요금변동폭을 150% 이내로 정하면 요금 등락폭을 줄일 수 있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전기요금에 에너지 가격의 변동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게 맞다”며 “유가가 낮은 지금이 새 요금제 도입의 적기”라고 말했다.

하남현 기자 도쿄=오영환 특파원, 뉴욕=이상렬 특파원 ha.nam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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