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북으로 간 연예인들의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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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960년대말 새로이 형성된 김정일 문화예술 참모부가 문예봉숙청 빌미로 잡은것은 북괴선전잡지 「조선영화」 (영화동맹기관지) 65년 4월호에 게재된 문예봉의 수필 (나운규를 조선인민이 낳은 천재적인 영화예술가라고 부르면서 추모한 내용) 이었다. (주: 전회참조)
비록 그것은 지난시기 (60년대 중반-북괴가 공식적으로 나운규를 퇴폐 영화감독으로 낙인 찍기 이전)에 쓴 글이지만 「필자 (문예봉)의 그같은 복고주의와 감상주의, 그리고 개인숭배사상이 얼마간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변할 턱이 없다」는 것이 김정일 문화예술 참모부의 주장이었다.
더구나 그동안 김정일 참모부에서는 문예봉을 제거하기 위한 구실 찾기에 혈안이 되어온 터였다. 결국 문예봉은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이른바 「노동개조」 처분을 받고 말았다.
한편 그녀의 남편 임선규는 당시 멀리 함경북도 주을온천 근처의 「결핵환자 요양소」에 수용되어 있었는데 그는 아내 문예봉을 다시는 보지 못한 채 1970년 봄에 죽고 말았다.
북한에서 임선규를 마지막으로 만나 본 사람이 현재 남한에 거주하고 있다. 윤기봉이라는 분이다.
윤씨는 1938년 경기도 김포 출생으로 6·25당시 북괴 의용군에 강제 동원되었다가 월북, 그후 온갖 고생 끝에 평남 북창 제 5중학교 교장, 평남 안주군당 교육부장, 함흥 사범대학 당위원을 역임했으며 1970년 8월 대남공작원으로 남파되어 즉각 대한민국에 귀순(자수)했다.
윤씨는 73년 12월 자신의 북한생활 체험기 일어판 『북조선견』 (내가 본 북녘땅) 를 집필, 출간했다.
여기서 문예봉은 물른, 모든 월북 예술인들의 실상 이해를 돕기 위해 윤씨의 수기가운데 윤씨가 임선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부분「임선규의 한탄」의 일부분을 다음에 옮겨본다.
-임선규는 일정때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란 신파극을 써서 그 당시 관객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그가 1948년 북한당으로 들어간 뒤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나도 임선규가 자기 처인 문예봉에게 얹혀서 지내고 있다는 정도로 그를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임선규를 1968년 여름 주을요양소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둘 다 요양온 처지여서 일을 떠난 개인생활을 두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 사이가 어지간히 가까워진 뒤 나는 그동안 궁금했던 일을 물었다.『임선생, 그새 통 글을 쓰시는 것 같질 않으신데 무슨 사연이라도 있읍니까?』 『글이요?』 임선규는 서글픈 미소를 짓더니 말을 이었다.『붓을 들어본지 정말 오래됐군요. 벌써 스무해가 넘었으니까.』 『왜 안쓰시는 겁니까?』 『안 쓰나요, 못 쓰는거죠.』 『못 쓰다뇨?』 『처음 희곡 몇편 써서 출판사들에 보냈더니 모두 되돌아 왔지요. 신파조라는 겁니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창작 방법을 더 배우고 쓰라는 말두 들었구요.』 『당에서 말인가요?』 『물론이죠. 머리가 새파란 문학파 지도원한테 욕을 먹기도 했죠. 글 쓸 생각말구 노동해서 사상부터 뜯어고치라구요.』
임선규는 이런 말을 하고는 땅이 꺼질듯한 한숨을 쉬었다. 백발이 성성한 그의 머리가 수그러지는 것을 보니 무척 측은했다. 그를 고무해주고 싶기도 했다. 『당에서 임선생을 믿으니까 이런 요양소에도 보내주는게 아니겠읍니까?』 『나를 믿어서 위하느라고 보낸 줄 아시면 잘못입니다.』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일루 요양온건 내 처 덕분이지요.』 『네, 그렇겠군요. 문예봉 동무께서 애쓰셨군요.』 『내 말을 잘못 알아듣는군. 내 처가 애쓴 덕이 아니라, 당에선 그 사람과 나를 격리시킬 사정이 생긴 겁니다.』 『아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윤동무는 당의 일꾼이니 잘 알겠지만 내가 공훈배우인 내 아내한테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날 서먹한 기분으로 헤어졌다. 그러나 적적한 요양소 생활은 다시 우리를 가까이 지내게 했고, 임선규가 하지 않으려 한 말도 하도록 만들었다. 그뒤 임선규한테 들어서 알게 된 사연은 이러하다.
당에서는 문예봉의 연기에 혁명성이 결여되었다는 판단을 내리고 그 원인을 캐보았더니 원인중의 하나가 폐병으로 신음하고 있는 남편 임선규가 .그녀에게 충절하고 나약한 감정을 심어주고 있다는 것으로 규명되었다. 그래서 문예봉이 『빨치산 처녀』라는 영화의 주역을 끝낼 때까지만이라도 임선규와 별거시키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요양소에 요양을 하러온 것이 아니라 집에서 쫓겨나 이 요양소에 맡겨진 것이지요』 하고 임선규는 쓸쓸하게 웃었다.
그후 문예봉이 주연한 『빨치산 처녀』라는 영화가 나왔으나 당은 문예봉의 연기가 여전히 나약하고 감상적이라는 혹평을 내렸다. 임선규와 격리시켜도 별 효과를 보지 못한 것이다.- <이기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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