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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영화 왜 후진성 못면하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북의 78년 최은희·신상옥부부의 납치극은 끝내 「미완의 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북한은 왜 이 영화인 부부를 납치한 후 단순한 정치선전극 뿐만 아니라 많은 금액을 투자해 빈에 신필름 영화촬영소를 차려주며 직접 영화제작을 맡기려 했는가.
북한은 영화예술의 낙후한 연기력과 제작기술의 보완을 위해 두사람을 필요로 했고 또 십분 활용하려 했다.
사회주의 선전예술로 굳어버린 북한영화가 자유주의 물결이 스민 동구에서 조차 먹혀들지 않자 두사람을 납치해 만든 영화로 국체영화 무대 진출에 안간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과연 북한 영화계의 실상은 어떤 것일까.
북한의 문화예술은 출발부터가 순수한 미의 창조나 가치추구란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의 영화란 주민을 선동, 교화시키는 사상 전위대구실을 담당한다.
영화제작기구 역시 정권의 직접 관리하에 놓여 외형상으로는 우리의 개인영화사에 비해 조직이 비대하다고 볼 수 있지만 기술적인 면에서는 우리의 60년대 수준정도의 「후진성」 을 벗어나지 못하고있다.
북한의 음악·미술·연극·영화·무용 등은 예술이전에 공산주의 사상과 김일성 유일사상을 고취시키는 수단으로 쓰여왔으며 최근에는 김일성 부자 세습체제를 합리화하는데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가장 좋은 선전무기로 간주되고있다.
김일성의 후계자로 등단한 김정일이 북한의 선전선동 및 문화예술분야를 통괄하게 된 지난 70년대 후반 이후의 영화는 「현시기 영화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사명과 과업은 위대한 수렴 김일성을 영화화면에 형상화하여 온 세상을 수령의 주체사상으로 일색화하며 수렴케 만족과 즐거움을 드리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결국 이런 목적하에서 영화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영화제작은 리듬과 템포가 지나치게 완만한 연출을 강요해왔다.
또 전체주민들을 보다 알기쉽게 석득, 교화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만들어 온 결과 독창적인 표현수법의 불필요성과 함께 새로운 「실험정신」도 금기시돼왔다.
그들 영화가 낙후된 이유중의 또 한가지는 기록영화를 예술영화(극영화)보다 더 우위에 두고 있다는 점도 꼽을 수 있다.
영화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했던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이 그랬듯이 북한에서의 기록영화 역시 주로 당정책을 제때에 구현하는 수단으로 사용해왔다.
연기면에서는 메시지 전달에만 치중한 탓으로 표현의 일상성을 상실하고 과장된 신파조의 표현이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게 북한 영화의 「정형」이다.
또한 등장하는 인물도 공산주의적 선과 악의 구별을 명확히 해서 김일성을 찬양·숭배하고 반동을 규탄하는 긍정적인 인물(피지배계급)과 당의 방침에 저해적 요소로서의 부정적인물(지배반동계급)등 두 유형으로 염격히 구분, 적용되어 왔다. 이는 분노하는 선량한 대중과 표현·동작까지 전형적으로 타락한 착취자로 대별됨으로써 배우의 연기에 의한 심오하고 섬세한 감정전달이 막히며 다양한 인간모습과 다양한 연기술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이같은 모든 이유들이 북한을 영화후진국으로 전락시켰지만 영화의 국제교류가 많지 않았던 60년대 말 까지만 해도 그 낙후성을 극복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단순히 북한주민들용 뿐만 아니라 대외선전용 영화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지만 기술습득이 용이치 못했다.
조선영화제작소, 2·8영화촬영소등 양대 국영영화제작소에서 한해 평균 20∼40편씩 제작되었지만 대외선전용 영화로는 내놓을 것이 못되었다.
결국 그런 모든 여건을 단시간에 극복하는 한 방법으로 연기·감독·제작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가진 최·신부부의 납치극까지 벌여 그들로 하여금 10여편에 달하는 대외선전용 영화제작을 맡게했던 것이다. <양헌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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