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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동란 부산 피난 시절-다방 마담과 손님으로 인연|신상옥·최은희 부부의 「인생 항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신상옥·최은희 커플의 운명적인 만남은 53년 항도 부산에서 이루어졌다.
이미 영화계에 투신했지만 6·25의 거친 피난살이 끝에 부산 시내 녹화 다방 얼굴 마담으로 있던 최은희씨는 27세의 지아비를 둔 유부녀.
신상옥씨는 이 다방의 단골로 당시 『코리아』라는 기록 영화를 만드는 33세의 패기만만한 청년 영화인이었다.
이렇듯 두 사람의 공통점과 최씨의 불행한 남편과의 관계, 최씨가 극단 무대에서 공연 중 영양 실조로 쓰러진 것을 신씨가 옮겨준 것 등이 계기가 돼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급기야 동거 관계로 들어갔다.
최씨의 전남편 김학성씨 (작고)는 일본 와세다대 출신의 인텔리로 6·25동란 중 종군 기자로 활약, 격전지에서 불구가 된 뒤 최씨에게는 행패나 부리는 흉포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후 24년 동안 부부이자 감독과 여배우로서 한국 영화계에 거봉을 이루었던 신·최 커플은 76년8월12일 합의 이혼장에 서명, 남남으로 갈라섰다.
이혼의 표면상 이유는 신상옥씨와 신인 여배우 오수미씨와의 내연의 관계.
최은희씨는 26년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에서 최영환씨의 2남 3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최경순.
배우가 꿈이었던 최씨는 15세 때 가출, 당시 서울 종로 6가에 있던 경기 기예 학교에서 3년간 연기와 춤을 익힌 뒤 배우 문정숙씨의 언니 문정복씨의 소개로 극단 아낭에 가입했다.
연극 『청춘 극장』에서 하녀 역으로 데뷔한 최씨는 46년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세』에서 주연으로 발탁돼 본격적인 배우의 길로 들어섰지만 6·25발발로 여자로서는 견디기 힘든 비극을 경험했다.
6·25발발 몇개월 전 김학성씨와 결혼, 신혼 살림을 차렸던 최씨는 서울이 북괴군의 손에 넘어간 50년6월29일 우여 곡절 끝에 3백여명의 배우·가수·악사들과 함께 「북괴 경비대 합주단」 멤버가 돼 전방 부대 위문 공연에 강제 동원됐다.
같은 해 7월21일 대전을 점령한 김일성은 충북 수안보에서 승전 축하연을 벌였고 이 자리에 최씨를 비롯, 남한 연예인이 출연했다.
김일성을 비롯, 최용건 (민족보위상) 김책 (야전군사령관) 박성철 (15사단장) 등 30여명의 북괴군 수뇌부가 참석한 자리에서 최씨는 『한강수 타령』을 부르며 춤을 추었다.
함북 청진이 고향인 신상옥씨는 일본 동경 미술 전문 학교에서 영화 공부를 하고 해방과 함께 귀국, 「고려 영화협」의 미술 감독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의 첫 작품 『악야』는 이상에 치우친 작품으로 흥행에 실패했고 신씨는 무명 영화 감독 밑에서 전전하다가 『코리아』라는 기록 영화를 만들던 중 최씨와 만났다.
신·최 커플은 신 감독의 『코리아』에서 최씨가 춘향역을 맡은 것을 시발점으로 『꿈』『벙어리 삼룡이』『상록수』『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성춘향』『무영탑』『동심초』 등이 크게 히트, 납북되기 전까지 30여년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은막에서의 화려함과는 달리 생활 속의 이 커플은 불행했다.
그 불행은 무엇보다 최씨가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는 데서 비롯됐고 신 감독의 영화사업이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가속화됐다.
최씨는 양녀 명희씨 (26)와 양자 정균씨 (24)를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켜 가정의 불행을 막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70년 초 신 감독이 인수한 안양 예술 학교의 경영이 재정난으로 난관에 부닥치면서 두 사람 사이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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