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우2016] 독일 잘 아는 류승우, 마음 급한 독일 빈틈 노려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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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 32분 권창훈(23·수원 삼성)의 패스를 받은 류승우(23·빌레펠트)는 첫 골을 터뜨린 직후 골대를 향해 달려갔다. 화려한 세리머니를 예상했는데 그냥 공을 집어 들고 나왔다. 고의적인 시간 지연 행위로 착각한 주심이 제지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공을 들고 센터서클까지 달려갈 기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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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우 가 5일 피지와의 경기에서 크로스를 올리고 있다. [뉴스1]

후반 18분에 대포알 같은 슈팅으로 팀의 4번째 골을 넣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류승우는 세리머니 대신 골대 근처에 있던 동료들에게 빨리 우리 지역으로 넘어가자고 손짓했다. 두 번의 행동을 통해 ‘우린 아직 배고프다. 더 많은 골을 넣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던 것 같다. 류승우는 후반 추가 시간 중 해트트릭을 달성하며 팀의 8번째 골을 넣은 뒤에야 여유 있게 웃었다.

안정환 관전평
피지전 골 넣고도 세리머니 안 해
‘아직 배고프다’ 메시지로 팀 이끌어
첫판 비긴 독일, 8일 한국전 올인
빠르고 배짱 좋은 나브리 대비해야

피지와의 리우 올림픽 남자축구 조별리그 1차전은 전술이나 선수 구성을 논할 필요가 없는 경기였다. 8골이라는 점수 차가 말해주듯 모든 게 일방적이었다. 한국은 90분간 29개의 슈팅(피지는 5개)을 시도했고 533개의 패스(피지는 70개)를 주고받았다. 이런 경기에서도 집중력을 흐트러짐 없이 유지한 우리 선수들을 칭찬하고 싶다.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호랑이라면 사자나 곰과 싸울 땐 더 강한 집중력을 기대할 수 있는 법이다. 경기 초반에 살짝 고전한 게 옥의 티였는데, 선수들 간 패스 타이밍에 엇박자를 낸 게 원인으로 보였다. 전반 중반을 넘기면서 전체적으로 패스의 질이 좋아지며 문제점도 사라졌다.

우리 경기에 앞서 조별리그 상대 독일과 멕시코의 1차전을 지켜봤다. 양 팀이 첫 경기를 2-2 무승부로 마친 것을 두고 우리 팀의 유불리를 따지는 해석이 엇갈리는데, 냉정히 말해 그리 유리한 상황은 아닌 듯하다. 멕시코가 피지와의 2차전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큰 만큼 독일이 우리와의 2차전에 승부를 걸어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물론 첫 경기에서 쾌승을 거둔 우리나라가 마음이 급한 독일을 잘 요리한다면 오히려 쉽게 결선 토너먼트행을 확정 지을 수도 있다.

독일의 전력 구심점으로 라르스·스벤 벤더(이상 27세) 쌍둥이 형제가 첫손에 꼽히는데, 멕시코전 전반에 교체 투입된 제르게 나브리(21)에 대한 대비도 필요해 보였다. 두 살 많은 형들과 뛰면서도 흐름을 주도하는 배짱이 있었다. 독일 선수들은 대개 체격이 큰 대신 민첩성이 떨어지는데, 나브리가 다른 선수들의 약점을 적절히 메워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빠르고, 패스 좋고, 키핑력도 뛰어난 ‘물건’이라 여러모로 돋보였다.

독일전에는 손흥민(24·토트넘)과 류승우의 활약이 기대된다. 독일 분데스리가를 경험한 두 선수는 독일 선수들의 장단점을 누구보다 잘 안다. 유럽에서는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적으로 만나 골을 넣거나 맹활약한 선수가 소속팀에 복귀하면 팬들이 더 큰 박수를 보내주는 문화가 있다. ‘우리 팀에서 뛰며 한층 수준 높은 선수로 성장했으니 축하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격려 표시인 셈이다. 그러니 류승우는 소속팀 복귀 이후를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골을 넣어도 된다. 그런데 이탈리아와의 2002 한·일 월드컵 16강전에서 내가 골든골을 넣은 직후 당시 소속팀인 페루자(이탈리아)의 팬들은 왜 내 자동차를 때려 부순 걸까. 다시 생각해도 미스터리다.

독일보다는 멕시코가 더 귀찮은 상대가 될 것 같다. 중남미 선수들은 우리 선수들과 비교해 장점은 엇비슷한데 순발력이 더 좋다. 한국 축구가 전통적으로 남미팀을 만나면 고전하는 이유다. 신태용(46) 감독과 친분이 두터운데, 첫 경기를 앞두고 부담감이 클 것 같아 카톡으로 간단히 인사만 나눴다. 기분 좋은 대승으로 마무리했으니 마음 편히 전화 한 통 걸어봐야겠다. 리우에서.

정리=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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