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칼럼] 유럽에 부는 新 반미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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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미국과 유럽의 대서양 동맹은 지금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고 있다. 조지 로버트슨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사무총장은 나토가 더 이상 미국의 이라크전 수행에 도움을 줄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나토가 이번 사태에서 살아남을 수도 있겠지만 미국이 옛 공산권에 군사기지를 유지할 구실을 마련해 주는 이상의 의미는 없을 것이다. 미국은 한쪽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유럽은 다른 방향, 그것도 미국과의 라이벌 관계가 성립되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유럽은 마지못해 이런 선택을 했지만 지난 2년 동안 유럽이 미국을 바라보는 시각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유럽은 지금 미국을 유럽 독립성에 해가 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몇 주 동안 나는 유럽에서 열린 많은 국제회의에 참가했다. 표면적인 주제는 미.이탈리아 관계, 유럽 안보 문제, 세계 금융경제 정책 등 회의마다 달랐다.

하지만 어느 주제에서 시작했던간에 토론은 항상 조지 W 부시 행정부 주도의 '새로운 미국'에 대한 설전으로 이어졌다. 세계 평화를 깨뜨리고 동맹국들의 안보에조차 위협이 되는 미국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주요 내용이었다.

이런 회의에서 미국의 현 국제정책을 옹호하는 서유럽인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마지못한 영국인 한둘이 전부였고, 네덜란드.독일.이탈리아.스칸디나비아인은 전혀 없었다.

쉽게 말하자면 유럽인들은 더 이상 미국에 동의하지 않는다. 유럽인들은 미국이 주장하는 테러의 위협에 동의하지 않는다. 유럽인들은 오사마 빈 라덴이 국제적으로 큰 위협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소위 '깡패 국가'들에 대해서도 미국과 견해를 같이하지 않는다. 선제공격 전쟁, 문명 간의 충돌, 이슬람교의 악마화나 미 국방부의 미국 외교 정책 독점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유럽인들의 이런 관점은 미국에서 '반미주의'로 인식된다. 하지만 옛 공산주의 국가의 한 주요 보수주의 정치인의 말을 빌리자면 진실은 부시 행정부가 미국의 친구들을 반미주의자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이 정치인은 자신이 정치인으로 살아오는 동안 항상 미국을 존경했고 유럽 좌익 비판론자들로부터 미국을 옹호해 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이 정치인조차 자신이 '신 반미주의자'가 됐다고 한다.

그는 '신 반미주의자'들을 "예전에는 반미주의자들을 반대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그들조차 미국을 반대할 수밖에 없게 된 사람들"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최근 자국 주재 미국대사가 행동하는 꼴이 꼭 1989년 소련 붕괴 전 소련대사들이 하던 짓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이런 미국의 태도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행태다.

미국의 주요 정책 실권자들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프랑스.독일.벨기에를 탓하며 그들이 미.유럽 불화의 원인이라고 단정짓는다.

그들은 유럽인들이 "9.11이 미국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는 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길 좋아한다. 하지만 그들은 9.11 이후 서유럽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는 점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내가 참석한 회의들에서 견해를 나눈 워싱턴의 신보수주의 관료들은 미국의 힘과 이라크에서의 승전을 자축하고 유럽에는 지금이라도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지 않은 점에 대해 사과하라고 요구한다. 그들은 아직도 "우리와 견해를 같이하지 않는 자들은 세상에 중요치 않은 존재"라고 외치고 있었다.

미국 대학들과 연구소들의 전문 분석가들은 다른 토론자들에게 대부분 "유럽도 이제 성숙해질 때가 됐으니 테러의 위협에 잠을 깨라"며 거만한 태도를 취했다.

아일랜드 공화군(IRA), 독일과 이탈리아의 적군파, 스페인 바스크 분리주의 단체 (ETA), 팔레스타인 해방전선(PLO) 유럽 지부 등 유럽도 기나긴 테러와의 전쟁 역사를 갖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지 말이다.

윌리엄 파프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칼럼니스트
정리=이근영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