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라도 버려야 한다" 하비브가 건의|마르코스 정권 붕괴되기까지…긴박했던 워싱턴과 마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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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장두성 특파원】
「조용한 외교」라는 이름으로 「마르코스」에 대해 막후에서만 압력을 가해온 「레이건」행정부가 처음으로 공개적 공세를 취한 것은 지난 9월「아키노」암살사건에 관한 재판 때였다.
이때 미국무성은 「아키노」가 암살된 83년8월21일 필리핀 공군 요원들이 「아키노」가 탄 여객기를 바사공군기지에 강제 착륙시키기 위한 「작전」을 실시했으나 실패했다는 레이다기지 소속 미공군병사 6명의 증언 내용을 공개했다. 미국무성은 「아키노」사건을 기소한 필리핀 검찰이 이 증언을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공개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로써 「아키노」사건을 둘러싸고 침묵을 지켜온 미국은 이 사건을 다루는 필리핀 사법 절차에 대해 심대한 의문을 제기했고 「마르코스」에 대한 불신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이에 앞서 85년1월에는 미국무성이 정책지침으로 삼을 주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미국이 한편으로는 『야당과의 대화를 진행시키면서』다른 한편으로는 「마르코스」를 지지하는 양면정책을 통해 「마르코스」의 행동을 유도해야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보고서를 토대로 미행정부는 새로운 정책검토를 실시했다.
「마르코스」의 내정개혁을 유도하려는 압력은 미의회와 국방성에서도 나왔다. 하원은 86년도 필리핀군원안 1억달러를 놓고 만약 「아키노」암살에 연루된 것으로 보이는 「베르」참모총장이 복직될 경우 이를 2천5백만 달러로 대폭 삭감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국방성은 「마르코스」가 미국압력에 대한 반발로 두개의 미군기지 철수를 요구할 것에 대비, 이들을 괌·사이판·티니언, 또는 팔라우도로 이전시키는 대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공개했다.
이에 앞서 84년1월에는「레이건」대통령이 「마르코스」에게 친서를 보내 경제와 군부를 개편하고 민주화를 강력히 추진하라고 촉구했다. 「마르코스」에 대한 미국의 압력이 본격화한 것은 지난 10월 「랙설트」미상원의원의 방북 때였다. 「레이건」대통령의 두번째 친서를 휴대한 「랙설트」의원은 「레이건」대통령의 특사자격으로 군용기를 타고 마닐라에 도착했다. 그와 같은 방문형식은 지난 2년동안 미국이 「조용한 외교」채널로 보낸 신호를 「마르코스」가 무시한데 대한 미국측 불만이 암시된 것이라고 워싱턴에서는 보고 있었다.
그가 가져간 친서내용도 과거와 같은 개혁종용을 넘어서 「마르코스」의 부정을 조목조목 나열하고 그 결과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지적하는 「강압적인」것이었다.
「레이건」은 결론에서 「마르코스」가 내정을 수습하지 못하면 필리핀에 재앙이 올 것은 물론이고 이 지역과 세계 군사력 균형에 영향이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뉴욕타임즈는 85년10월20일자 사설에서 「레이건」대통령이 「랙설트」의원을 통해 경고를 한 것은 옳은 행동이었다고 격려했다.
「레이건」대통령이 이 친서를 쓴 직접적인 계기는 지난 10월 워싱턴을 방문한 이광요 싱가포르수상의 권고였다는 설이 있다.
「랙설트」상원의원의 마닐라방문을 전후해서 미국 신문들이 대대적으로 「필리핀의 위기」를 기사로 취급한 것을 보면 미행정부 실무자들이 그때 이미 얼마나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상원 정보위원회에 속해있는 한 의원은 『미국은 제3의 대안은 아직 검토하고있지 않은 것 같다』는 반어법을 통해 CIA 교란작전과 같은 은밀한 대안까지도 준비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지에 따르면 이때 한 행정부관리는 이렇게 미국측 입장을 설명했다고 한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작업(「랙설트」의원의 마닐라방문)은 제2막이다. 1막은 83년 「레이건」대통령의 아시아 방문때 필리핀방문을 취소한 것이 제1막이었다. 이번에 「마르코스」가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제3막은 종막이 될 것이다.
「랙설트」의원을 파견키로 한 이유중의 하나는 미중앙정보국(CIA)과 국방정보처(DIA) 및 국무성이 공동으로 작성한 「특수 국가정보 평가서」(SNIE)였다.
외교실무자들이 「마르코스」의 장래에 대해 아직도 희망을 걸고있던 지난해 7월,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은 이미 「마르코스」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있었다.
한편 미국정부는 과거 월남의 「고·딘·디엠」정부에 대해서도 끈질기게 최고장을 보낸 경험을 갖고있다.
63년9월19일 「케네디」미대통령은 「로지」주월미대사를 통해 「디엠」정권에 무려 25개항에 달하는 개혁안을 전달했다.
이 미국의 경고장은 ▲「티엠」의 권력분산 ▲불교도학생석방 ▲언론자유허용 ▲비밀경찰의 만행중지 ▲개각단행 ▲자유가 보장된 선거실시 ▲국민들의 해외여행자유허용 등 광범위한 내정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결국 「디엠」정권은 미국의 이같은 최고장을 받은지 42일만인 63년11월1일에 무너지고 말았다.
필리핀혁명이 성공하기까지 「레이건」미대통령은 「마르코스」지지와 관련, 찬·반·중립의 세갈래 선택을 놓고 적지 않은 진통을 겪었다.
「레이건」대통령은 강경한 반「마르코스」분위기에 휩싸여 있는 의회와 이에 동조하는 「아머코스트」국무차관, 「월포위츠」국무차관보의 강경입장과 「슐츠」국무장관, 「와인버거」국방장관의 「마르코스」지지철회 신중론, 그리고 「도널드·리건」백악관 비서실장과 「포인덱스터」안보담당보좌관의 중립정책권유에 휩싸여 일관적인 정책을 시행하지 못하고 필리핀 사태진전에 따라 조금씩 다른 입장을 밝혔다.
이같은 「레이건」행정부의 흔들리는 입장으로 인해 필리핀사태는 「마르코스」의 사임거부고수와 「코라손」의 혁명성공확신이라는 혼란이 상당기간 지속됐다.
이 때문에 「마르코스」나 「코라손」양측은 서로가 미국의 지지를 받고있다고 믿기까지 했다.
미국의회는 지난7일의 필리핀 대통령선거후 부정선거가 확실한 이상 「마르코스」의 대통령당선 정당성을 부인하고 계속 「마르코스」의 사임을 주장해왔다.
「슐츠」및 「와인버거」의 「재고」요청에도 불구하고 상원은 85대9로 필리핀선거부정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했으며 하원아시아-태평양소위원회도 9대0으로 대필리핀군원 잠정중지를 의결했었다.
이같은 의회의 결의 전에 「슐츠」국무장관과 「와인버거」국방장관은 의회에 나가 「마르코스」지지철회나 대필리핀 군원중지를 자제하도록 증언했었다.
이들의 주장은 당시까지 필리핀의 정치를 장악하고 있는 「마르코스」를 공식적으로 포기하는 것은 수빅만 및 클라크기지에 대한 미국의 이익에 배치될 뿐만 아니라 필리핀공산세력인 신인민군(NPA)에 유리한 상황만 제공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레이건」대통령은 필리핀선거직후 『필리핀에는 양당정치가 확립돼 있다』, 『선거부정은 「마르코스」측과 「코라손」측 모두에서 나올 수 있다』는 등 「코라손」에게 불리한 입장을 표명했었다.
그러나 의회와 「아머코스트」국무차관은 물론 국무성관리들의 『「마르코스」의 시대는 이미 끝났다』는 주장에 따라 다시 「레이건」의 성명은 『필리핀에서 평화적인 정권이양을 촉구한다』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리건」비서실장이나 「포인덱스터」안보담당보좌관이 『필리핀의 양대 대립 세력에 대해 어느쪽을 강하게 지지한다는 것은 필리핀사태가 어느 쪽으로 흘러가든 미국의 이익에 손해를 끼칠 수 있다』는 주장에 따라 『어느 쪽 지지를 유보한다』는 국무성의 후퇴 입장표명이 나오기도 했다.
「레이건」행정부의 「중립」태도는 특히 「코라손」이 대통령취임식을 강행한데 이어 「마르코스」도 대통령임을 선언하는 1국 2대통령 체제가 생겨나자 가장 극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같은 「레이건」대통령의 입장은 「슐츠」와 「와인버거」의 건의로 「하비브」특사가 마닐라로 파견되고 그의 보고를 받은 뒤 「코라손」지지 쪽으로 굳혀졌다.
「하비브」의 마닐라에서의 임무는 「마르코스」의 사임에 촛점이 맞혀져 있었다.
「하비브」는 「코라손」등 반「마르코스」진영을 만나 「마르코스」의 시대는 이미 끝났으므로 폭력에 의하지 않는 방법으로 때를 기다리라며 「마르코스」와의 어느정도 화해를 종용, 「설득」에 나섰다. 「코라손」은 화해를 거부하고 계속 투쟁을 선언했다. 그는 또 「마르코스」를 만났을 때도 같은 설득을 벌였다.
그러나 「마르코스」는 『선거결과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선거 부정은 오히려 「코라손」쪽에 있었다』고 「하비브」를 설득하려했다.
「하비브」의 마닐라 임무는 이같은 양측의 설득작업에서 커다란 성과를 기대한 것 보다도 「코라손」측에 확신을 가져다주는 쪽으로 바뀐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비브」가 마닐라를 떠난직후 「엔릴레」국방상과 「라모스」군참모총장 등 「마르코스」정권의 군부지도자가 반기를 든 것은 「하비브」의 「언질」이 있었던 탓이 아니냐는 분석이다.
「하비브」가 워싱턴으로 돌아가 필리핀사태를 보고하기까지 「레이건」대통령의 입장은 계속 강온의 와중에서 분명한 태도를 결정하지 못하고 엉거주춤 하고 있었다.
따라서 「하비브」의 워싱턴에서의 임무는 「레이건」대통령에게 「마르코스」를 단념하라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레이건」대통령은 70년대 마닐라를 방문, 이미 「마르코스」와 친분이 있고 「마르코스」가 필리핀의 미군기지에 대한 가장 안전한 보증수표라는 생각으로 「마르코스」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었다. 「하비브」는 그러나 『아무리 친한 사이일지라도 그를 버려라』며 「레이건」대통령에게 읍참마속의 용단을 건의했다.
이같은 「하비브」의 건의는 「마르코스」가 마지막 순간에 「랙설트」상원의원과 가졌던 한밤중의 전화회담에서 결정적으로 효력을 나타냈나.
「레이건」대통령은 「랙설트」-「마르코스」의 1차 전화회담후 가진 보좌관과의 긴급회의에서 『「마르코스」가 필리핀 신정부에 남는 것은 부당하다』며 그의 「깨끗한 단념」을 촉구했다.
「레이건」대통령이 마지막 단계의 「결심」에 이르기까지 사태추이에 따라 앞선 성명을 번복한 것은 이같은 미국행정부내의 의견차이도 있었지만 국무성의 한 관리가 말하는대로 『「레이건」대통령은 귀가 너무 엷어』보좌관들의 말을 쉽게 받아들여 가볍게 발언한 것도 커다란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진창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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