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대통령의 입' 9년] 27. 71년 비상사태 선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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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1970년대 초 박정희 대통령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국가 안보를 굳건히 하면서 경제성장을 지속하느냐였다. 박 대통령은 세계적 긴장완화를 이용해 71년 북한과 대화를 시작함으로써 전쟁 재발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북한의 적화 야욕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은 국가를 지키고 경제발전을 이루려면 국민의 자유를 다소 유보하더라도 국력을 최대한 조직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19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박정희 대통령은 이듬해 1월 1일 비상사태 극복 의지를 담은 신년 휘호를 남겼다.

71년 4월 대선에서 승리한 뒤 박 대통령은 교련(대학의 군사교육)에 반대하는 시위에 직면했다. 이를 포함해 국내외 정세가 불안하자 박 대통령은 그해 12월 6일 국가의 비상사태를 선언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오늘의 비상사태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평화체제에는 적지 않은 취약점이 내포되어 있다. 민주주의가 가장 소중한 것이라면 이것을 강탈하거나 말살하려는 자가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침략의 총칼을 자유와 평화의 구호만으로 막아낼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응분의 희생과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필요할 때는 우리가 향유하는 자유의 일부마저도 스스로 유보하고 이에 대처해 나가야겠다는 굳은 결의가 있어야 한다."

중요한 정책을 검토 중일 때는 미리 사석에서 수석비서관 몇 명에게 그 핵심적 문제점을 화제에 올려 그들의 반응을 떠보며 본인의 결심을 재확인하는 것이 박 대통령의 버릇이었다. 비상사태 선포 며칠 전 나는 박 대통령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 '자유권의 일부 유보'는 예사로운 발언이 아니다 싶었다.

정치를 한다는 사람이면 표를 의식해 달콤한 소리부터 해놓고 보는 것이 상례이지 않은가. 자유권을 늘려주겠다고 해야할 판인데 유보한다니 정치를 안하겠다는 것인가.

나는 나름대로 제법 생각한 끝에 "정치가로서 너무 솔직한 발언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즉각 "지금처럼 비상사태하에서 국민에게 솔직하게 말해야지 어떻게 꾸며서 얘기할 수 있겠는가"라고 진지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비상사태 선언 두 달 전에 국회에서는 커다란 파동이 있었다. 박 대통령의 뜻에 어긋나게 김성곤 의원 등 이른바 4인체제를 중심으로 하는 여당 일부 의원들이 야당이 제기한 오치성 내무장관 불신임안의 가결에 동조했던 것이다. 이는 4인체제 지도부가 당권에서 물러나는 숙청을 당하는 참변을 불렀다.

박 대통령은 비상사태를 선포할 때 주변 정세의 변화와 북한 측 무력 도발의 극렬화 등 직접적인 국가안보 요인은 물론 공화당 4인체제의 반란 사건과 그것이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까지도 포괄적으로 고려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박 대통령은 국회의 '정치적 비능률'도 평화체제가 안고 있는 취약점의 하나로 보았으며 그 연장선 위에서 국가 안보가 위태롭게 되어 나라가 없어진다면 그때 가서 자유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던 것 같다.

김성진 전 청와대 대변인·문공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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