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기업 이렇게 정리하다|과거의 업종별 사례를 통해 살펴보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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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정부가 마련한 산업합리화기준이나 조감법·특융과 같은 제도적인 장치는 부실기업 정리의 대원칙이자 조세·금융지원의 근거에 지나지 않는다.
부실기업 문제를 구체적으로 과연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하는 의문은 이같은 대원칙과 근거만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부분이 너무 많다.
이같은 의문에 대한 해답은 이미 지금까지 드러난 몇몇 부실기업정리대책의 사례를 살펴봄으로써 훨씬 손쉽게 구해진다. 우선 대성목재의 경우를 보자.
유원건설이 인수키로 가계약을 맺은 대성목재의 지난해말 현재 총부채는 약 8백억원 규모다.
문제는 인수조건인데 총부채 8백억원중 3백억원은 대성의 주거래은행인 조흥은행이 떼인셈 치고 대손처리를 하며, 나머지 5백억원의 부채를 유원이 안아 갚아나가되 7년거치 8년분할 상환 (거치기간중 무이자)의 조건이 붙었다.
그리고 이같은 대성목재의 인수는 유원측이 원해서가 아니라 지명되다시피 떠맡게 된 것이었다.
또 하나 I해운의 경우를보자.
H선사에 통합되는 I해운의 총부채는 3백25억원으로 이중 산은이 2백80억원, 조흥은이 20억원, 상업은이 25억원씩의 채권을 갖고있다.
H선사의 부채인수조건은 다음과 같다. 산은부채는 10년거치 12년 분할상환, 거치기간중 연리3%. 조흥은과 상업은의 부채는 10년 거치 15년 분할상환, 거치기간중 무이자. 이밖에 I해련의 정리자금 (미지급금 처리 등) 으로 27억원을 산은이 추가대출.
이같은 계열기업의 사례외에 해운과 해외건설 등 업종별 사례도 있다.
해외건설의 정리방안은 이미 밝혀진대로 해외건설 정리대상업체의 ▲신규수주는 억제하되 금융지원을 계속하고 ▲오는 4∼5월 착공할 총7천9백억원 규모의 시화지구 간척사업 제1단계공사를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돌려주며 ▲현재 위탁경영형태로 남아있는 남광토건·(주)삼호·국제상사 건설부문 등 3사는 오는 3월 이후 조감법이 시행되면 대림산업·쌍룡종건·극동건설 등 현재 위탁경영을 맡고있는 회사들이 정식으로 인수하도록 한다는 스케쥴이 짜여있다.
여기서 역시 문제가 되는 것은 인수조건인데 남광토건의 인수대상자인 쌍룡은 최근 제일은측과 남광의 부채2천억여원을 15년거치 5년분할상환(거치기간중 무이자)조건으로 떠맡고 추가로 매년 4백억원씩 5년간 2천억원을 정상화자금조로 지원받는다는데 원칙적인 합의를 본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이미 과거의 일이지만 지난84년 경남기업이 (주)대우의 위탁경영으로 넘겨지면서 붙여졌던 조건은 ▲4천6백억원 규모의 부채를 15년거치 15년분할로 갚고 ▲추가로 2천억원의 자금을 12년거치 5년분할상환조건으로 지원하며 ▲산은의 대우조선에 대한 대출금 2천9백억원중 5백50억원을 출자로 바꾸어준다는 것 등이었다.
경남기업은 지난해 7∼10월 김우중 회장이 29.5%의 주식을 취득, 인수가 끝났는데 이때는 조감법이 마련돼있지 않았으므로 앞으로 조감법이 시행되면 조세상의 혜택을 주기로 정부의 고위책임자가 「확약」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해운업계는 지난해7월 열렸던 산업정책심의회에서 의결된 바에 따라 일단 오는 88년까지 채무상환을 유예 받았으나 현재의 전망으로 보아서는 그때가서 다시 채무재조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업계의 지배적인 관측이다.
앞으로 벌어질 부실기업정리 대책이란 것도 구체적인 내용을 따져 들어가다보면 지금까지의 사례와 그게 다를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일단 산업합리화대상으로 지정하여 조세·금융지원상의 근거를 마련한 뒤 인수자가 선뜻 나서지 않으면 적당한 기업을 골라 떠맡겨서라도 정리를 추진하며, 그 과정에서 금융상의 파격적인 지원조건이 따라붙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예컨대 앞서 예를 든대로 I해운정리방안의 파격적인 조건이 전해지자 비교적 정상적인 방법으로 정리를 추진해오던 다른 해운사들도 일단 주춤한채 「눈치」를 보고있는 것이 요즘 해운업계의 현실이다.
또 해운업계의 통폐합이라는 것이 대부분 주력선사 위주로 은행부채를 한데 모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부채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정부로서는 점점 선택의 여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같은 부실정리 방안은 정부가 스스로 택한 「외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또 앞으로도 이같은 방법밖엔 달리 길이 없다.
문제는 앞으로 계속될 각종 업계에 걸쳐 30여개에 이르는 부실기업 정리의 개별 케이스마다 금융·조세상의 지원을 어느 선에서 최대한 「자제」하며 부실기업의 정리 뒤에 남는 국민경제의 부담을 어떻게 최소화 하느냐일 것이다.

<김수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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