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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삼성회장 회고록 발췌|사업시작할땐 완벽한준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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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제당설립 2년만에 나는 거부의 칭호를 받았다. 일신의 안락을 위해서는 그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나 나는 새로운 사업을 모색했다. 기업가는 축재 그 자체보다도 계속 사업을 키워나가는데 보람과 희열을 느낀다. 지난 4O여년 동안 나는 부정축재의 오명을 쓰고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하고 삼성이 송두리째 흔들릴뻔 했던 일도 한 두번이 아니다. 연금상태에 놓이기까지 했다.
온갖 고난을 극복하면서 힘을 다해 하나하나 새로운 사업을 기획하고 공장을 세워왔다. 이것을 더러 부도덕한 일이라고 비판도 하나 기업가에겐 그것이 창조항위이며 보다 높은 목표에의 정진이다.
당시 모든 것이 부족할때였고 특히 입는것이 귀했다.
그래서 면방과 모방에 대한 조사를 병행했다.
강성태상공장관을 만나 의견을 물었더니『긴 안목으로 보면 역시 면방보다 모방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불모지인 모방은 이사장만이 하실수 있다고 믿습니다』고 답했다. 결심을 굳히고 제일모직을 설립했다.
모직은 제당보다 더 어려웠다. 그럴수록 더욱 준비를 철저히 했다. 모직공장 건설에 필수불가결이라고 생각되는 온도·습도등 기후에서 전력·노동력·교통·용수에 이르는 48개 항목에 걸친 문제점과 대응책을 조목조목 적어놓고 하나하나 챙겨 나갔다. 나는 무슨 사업을 시작할땐 충분히 조사를 시키고 나 자신부터 납득이 되도록 철저히 연구한다. 매일매일 할일을 메모로 적어 아침 저녁 챙기고 따진다.

<사업 계속키우는데 기업가의 보람느껴>
모직공장건설에도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는데 기술진이나 현장노무자에게도 『국제수준의 모직공장을 우리손으로 건설해보자』고 계속 독려했다. 모두가 고생한 보람이있어 모직공장도 훌륭히 완공되어 싼 복지를 공급할수 있었다.
모직공장이 궤도에 오르자 다음비료공장에 착안했다. 먹는 것, 입는 것과 더불어 비료가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비료공장을 지으려니 막대한 외자가 필요했다. 당시 재계정상에 있던 삼성으로서도 역부족이었다.
그 무렵해서 여행을 하고 돌아오다 동경에서 새해를 맞았다. 호텔에서 TV좌담회를 보다가 차관으로 공장을 지을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귀국하자마자 이기붕국회의장과 이승만대통령을 차례로 만나 차관에 의한 비료공장건설계획을 밝히고 협조를 청했다.
이대통령은 매우 좋은 사업이라며 꼭 성취시키라고 격려해 주었다. 공장건설올 위한 본격적인 준비를 하는 일방 차관교섭을 위해 유럽여행길에 올랐다.
유럽에서 차관을 성사시켜 기대에 부풀어 있는데 4·19가나 이대통렁이 하야했다는 소식을 들였다. 미국을 거쳐 일본에 머물다가 귀국했다. 데모로 날이 지새는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 삼성산하 15개 전기업체가 탈세혐의로 조사를 받게 됐다. 평생 처음 검찰에 출두했다. 부장검사가 『그동안 탈세로 모은 재산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아직 자세히 계산해 보지를 못했다』고 하자 이번에는『왜 탈세를 했느냐』고 물었다.
나는『기업이 탈세를 안할 수 없는 불합리한 세제는 덮어두고 기업만 부정축재로 몰아 단죄하는 것은 사리에 어긋난다』고 반박했다.
세상이 혼란하여 사업할 의욕도 안나 칩거해 있으려니 김영선재무장관이 찾아와 경제를 어떻든 살려야겠으니 비료공장을 맡아 건설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새 사업을 시작할 여건이 안돼 우울한 마음으로 동경여행길에 올랐다.
61년5월16일 아침 골프를 치려고 차를 탔더니 운전기사가 『한국에서 군사혁명이 일어났다는 뉴스가 나왔다』고 알려주었다. 착잡한 심정이었다.
5월29일 경제인 11명이 부정축재혐의로 구속됐다는 신문보도가 나왔다. 그리고 그중 한명이『부정축재의 1호는 동경에 있는데 우리들 조무래기만 체포하는것은 불공평하다』 고 불평했다는 말도 들었다.
東京에서 정세를 관망하다가 내가 귀국하지 않으면 수습이 안될 것 같아 귀국을 결심했다.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닿자 한청년이 트랩을 뛰어올라 왔다. 내이름을 부르더니 먼저 내리게했다. 대기해온 지프에 타자 차는 우중을 달려 명동 메트로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연금이었다.
이튿날 박정희최고회의부의장을 만나야 하므로 대기하라고 그 청년이 전하더니 곧 데리러왔다. 간곳은 후에 원호처 청사가된 참의원 자리였다.

<화폐개혁·예금 동결 경제혼란만 부채질>
비서실(실장은 박태준 현 포철회장)을 거쳐 1백여평 돼보이는 방에 들어서자 군인 몇 사람과 함께 강직한 인상의 검은 안경을 쓴 사람이 걸어왔다. 박정희부의장임을 금방 알아볼수 있었다.
자못 삼엄한 분위기였다. 박부의장은『언제 돌아오셨읍니까. 고생은 되지 않았읍니까』하고 안부부터 물어왔다. 안도감을 느꼈다. 이어 부정축재자 11명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어왔다. 침묵이 흐르자『어떤 이야기를 해도 좋으니 기탄없이 말해달라』고 재촉했다. 소신을 솔직이 말하기로 했다.
『부정축재자로 지칭되는 기업인에게는 사실 아무 죄도 없다고 생각 합니다』 박부의장은 뜻밖인 듯 일순 표정이 굳어지는것 같았다. 그러나 계속했다. 『지금 재산액수로 보아 1위에서 11위안에 드는 사람을 부정축재자로 구속했지만 그이하의 사람도 역량이 부족했거나 기회가 없어 11위안에 못들었지 사양한것은 아닐것입니다. 같은 원조불이나 은행융자를 배정받아 그것을 날린 사람은 괜찮고 기업을 키운 사람만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부정축재자를 처벌한다면 그 결과는 경제위축으로 나타날 것 이니 경제인들에게 경제건설의 일익을 담당케 하는것이 국가에 이익이 될줄 압니다』 고 대답했다.
박부의장은 그렇게 되면 국민들이 납득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국가의 대본에 필요하다면 국민을 납득시키는 것이 바로 정치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잠시후 박부의장은 다시 한번 만날 기회를 줄수있겠느냐면서 거처를 물어왔다.
메트로호텔에서 연금상태에 있다고 했더니 자못 놀라는 기색이었다. 이튿날 그 청년이 찾아와 집으로 가도 좋다고 했다.
다른 경제인들도 전원 석방됐느냐고 물으니 그대로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나와 가까운 사람들일 뿐더러 부정축재 1호인 나만 먼저 나가면 후일 그들을 무슨 면목으로 대하겠느냐』고 거절했다. 다음날 그 청년이 찾아와 전원 석방됐다 하기에 홀가분하게 귀가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청년은 당시 중정서울분실장이던 이병희씨였다.
나는 오늘까지 생애에서 단 한번 공직을 맡은적이 있다. 전경련의 전신 한국경제인협회의 초대회장이 그것이다.
62년 6월9일 전격적으로 제2차 통화개혁이 실시됐다. 10대1의 명목절하와 함께 예금동결이 취해졌다.
이날밤 송요찬내각수반의 초청을 받고 요정 대하로 갔다. 모두자리를 잡자 송수반은 『8시에 중· 대발표가 있으니 함께 듣자』며 라디오를 가져오게했다. 통화개혁발표였다. 초청받은 경제인들은 깜짝 놀랐다. 송수반등은 『산업자금의 조달을 위한 조치인데 왜 기뻐하지 않느냐』 고 의아스러운 표정이었다. 나는『착상은 기발하지만 반드시 좋은 결과를 기대할수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고 전제하고『곤란한 사람은 많고 득볼 사람은 적을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이틈날 박의장에게 불려갔다. 대뜸『어제 방송 들았지요』하고 물었다. 『들었읍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큰 혼란에 빠질겁니다』
증대한 경제문제는 사전에 경제인협회와 협의키로 박의장은 나와 약속한바 있었다. 이야기 도중 빈번히 전화가 걸려왔다. 각 방면의 반응에 관한 보고인 듯 했는데 그다지 신통치 않은것 같았다.

<대규모의 비료공장 박대통령 강력 권유>
박의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어떻게 하면 좋겠읍니까』하고 수습책을 물었다. 『곧 해제하는 것이 어떻겠읍니까』하니『그렇게하면 정치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게 되지 않겠습니까. 다른 방도는 없을까요』하고 물어왔다. 전면 해제가 어려우면 기술적으로 서서히 풀어가는 도리밖에 없겠다는 말을 남기고 물러나왔다.
63년 박의장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이듬해 나는 청와대를 예방했다. 이 자리에서 박대통령은『이제 일을 피하지만 말고 새 사업을 일으켜 경제재건에 적극 참여해달라』며 농약공장건설을 강력히 권했다.
즉답은 어렵다고 하니 그렇다면 이미 구상했던 비료공장은 어떻겠느냐고 촉구했다. 역시 즉답을 피하자『우리에게 협조할 생각이 없느냐』고 다그쳐『다만 역부족일뿐』이라고 대답했다.
박대통령은 장기영부총리를 불러 책임지고 뒷받침하라고 즉석에서 지시를 했다. 그후 張부총리의 끈질긴 설득으로 이를 수락했다.
우선 다른 어느 나라보다 큰 규모로 짓겠다고 결심했다. 세계 최대의것, 연산36만t짜리 공장에 착수했다.
갖가지 난관을 헤치면서 삼정측과 차관계약을 체결했다. 몇번째 건설을 계획하고 그때마다 좌절됐던 비료공장이 10년만에 실현되는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날을 결코 잊을수 없다. 바로1966년 9월16일 이었다. 한비공정은 80%가까이 진척돼 있었다. 동경에서 기계선적을 독려하고 있는데 서울에서 긴급연락이 왔다. 보세창고에 있던 OTSA 5t(약5만달러)을 현장사원이 허가 없이 매각, 큰 소동이 일고 있다는 보고였다. 급거 귀국했다.
사태는 심각했다. 한국 제1의 재벌이 밀수를 했다고 신문은 연일대서 특필했고 국회에서도 문제가 됐다.
이미 벌금까지 물었는데 재수사가 시작되어 차남 창희를 비롯한 몇명이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이 정치문제화됐던 이면에는 당시 복잡한 정계사정이 얽혀 있었다. 지금 그것을 여기서 굳이 밝힐 생각은 없다. 다만 분명히 해두고 싶은것은 이에는 몇몇 정치인의 공작이 숨어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뿐 아니라 당시 권력구조의 중추에 있던 인물이 OTSA문제가 일기전에「한비주식의 30%증여」를 요구했던 사실도 있다.

<1년여 숙고한 끝에 정치가의 길을 단념>
국가헌납으로 끝난 이 한비사건은 파란 많던 내 생애에서도 더할 나위없는 쓰디쓴 체험이 아닐수 없었다.
나는 생애에서 단 한번 정치가가 되려 생각한적이 있다. 4·19와 5·16을 거치면서 우리경제가 혼미를 거듭하던 무렵이었다. 경제인의 사명과 사회적 공헌은 전적으로 무시되고 부정축재자라는 오명까지 쓰는데서 온 경제인의 한계를 통감한 것 도 정치가가 되려한 동기의 배경이었다. 그러나 1년여 숙고 끝에 정치가의 길은 단념했다.
그대신 나쁜 정치를 못하게하고 좋은 정치를 하게하여 정치보다 더 강한 힘으로 사회에 기여 할수있는 방도로써 종합매스컴의 창설을 결심했다.
동양방송(TBC)과 중앙일보를 창설하여 내가 이상으로하는 종합매스컴으로 키워가다가 10·26후 TBC는 KBS에 넘기는 아픔을 겪어야했다.
흔히 언론사업은 수지를 도외시하고 해야 한다는 통념이 있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좋은 신문은 합리적 경영위에서만 성립된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실현했고 또 좋은 결과를 얻었다. 매스컴이다, 문화재단이다, 자연농원이다하여 동분서주했던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전반에 걸친 10년간은 참으로 바빴다.
70년대 삼성은 전자기기와 중화학공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그래서 삼성은 제당· 모직· 무역· 보험· 백화점에서 조선과 플랜트· 유화· 방위산업· 호탤신라등으로 사업범위를 넓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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