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김영란법' 합헌…기업들 전전긍긍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매뉴얼을 만들려 해도 별별 상황이 다 있을 수 있어 엄두가 안난다".

기사 이미지

김영란법이 합헌으로 결정난 28일, 국내 한 대기업 관계자는 "법무팀과 직원들 행동 관리 대책을 논의해봤지만 예외 사항이 너무 많아 똑 떨어지는 대책이 안나오더라"며 이같이 털어놨다.

김영란법 시행을 앞두고 기업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관행적으로 해온 행동이 위법이 될 수 있어 걱정이 큰데 대책 마련은 쉽지 않아서다. 삼성그룹은 “현재로선 큰 원칙 하나만 확고하다, 법이 만들어지면 철저히 지키겠다는 것”이라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골머리를 앓고 있다. 공무원이나 언론인들과 만나는 현장에서는 밥값, 술값을 두고 별별 상황이 다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장소에서 식사를 마치고 도중에 합류한 공무원이나 기자도 n분이 1 부담을 해야 하는지, 늦게 왔다면 어떻게 입증해야 하는지, '소폭(소주+맥주 폭탄주)' 때문에 식사비가 많이 나오는 자리에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 공무원·언론인이 동석할 경우 이들에게도 술값을 분담을 요구해야 하는 지 등 애매한 상황이 많기 때문이다.

골프의 경우도 공정위는 '공식 행사'라면 허용된다고 하지만 공식과 비공식의 기준이 뚜렷하지 않다. 포스코의 경우 매년 진행하는 제철소 견학을 앞으로 어떻게 할지 벌써 고민이다. 포스코 관계자는 “기업이 필요해 진행하는 프레스투어인데, 교통편을 제공하는 게 금품 제공에 해당하는지 궁금하다”며 “사안별로 매번 유권해석을 요청해야할 상황”이라고 말했다.

기업들은 일단 시행일까지 남은 2개월을 교육 강화, 행동요령 숙지 주간으로 삼는다는 계획이다. 현대자동차 측은 “구체적인 법 조항과 시행령이 나오고 나면 이를 토대로 행동요령을 담은 지침서나 매뉴얼을 만들 지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LG그룹도 “권익위에서 설명집을 제작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를 토대로 법무팀과 직원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각 경제단체는 따로 매뉴얼을 만들지는 않았다. 대신 권익위 해설집을 집중 검토하고 있다. 경제단체들은 앞으로 자주 설명회를 열어 기업 대응책을 제시할 예정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은 앞서 지난 20일 대기업 임원 상대로 김앤장이 김영란법을 설명하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9월 중엔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권익위의 기업 대상 설명회가 열린다.

한 관계자는 “기업 사보도 언론사로 분류되는 등 대상이 모호하고 혼란스런 요소가 많아 9월 예정된 설명회에 관계자들이 대거 몰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기업들은 임직원들에게 "시행 초기 ‘시범 케이스’에 걸리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는 지침도 내리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최초로 적발되면 '낙인효과'가 커서 유사 위법행위가 보도될 때 마다 끊임없이 거론될 것"이라며 "문제의 소지가 없도록 9월 28일 이후로는 골프는 물론 저녁 회식 약속을 아예 잡지 말자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기업들은 전문 '김파라치'(김영란법+파파라치)의 등장도 우려하고 있다. 권익위는 김영란법 위반자를 신고한 사람에게 최대 20억원의 보상금과 최대 2억원의 포상금(자진 신고자 기준·일반 신고자는 최대 1억원)을 지급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문제는 파파라치가 위법행위 단속에 도움을 주지만 부작용을 낳을 소지도 많다는 데 있다. 실제 2001년 3월 등장한 ‘카(car)파라치’는 교통법규 위반 단속에 도움이 됐지만 전문 카파라치가 반복적으로 포상금을 지급받고, 폭행 사건 등 사회적 문제까지 발생하면서 시행 2년만에 폐지됐다. 불량식품이나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을 판매하는 업체를 신고해 포상금을 타내는 ‘식(食)파라치’, 현금영수증 발급을 꺼리는 영세 상인을 타깃으로 한 ‘세(稅)파라치’도 중소 식품업체나 영세 상인들이 피해를 입으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단순 위법행위를 적발하는 다른 파파라치와 달리 ‘김영란법 파파라치’는 입증 과정이 까다롭다는 점에서 불필요한 행정비용을 유발할 수도 있다.

대기업 한 관계자는 "주요 기업이나 고위직 공무원, 메이저 언론사 기자들은 주목도가 높아 파파라치의 집중 표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며 "업계에서는 혹시 골프를 갈 일이 생겨도 망원렌즈 설치가 가능한 아파트단지 인근 골프장은 기피하라는 웃지 못할 권장사항이 나올 정도"라고 말했다.

박태희·전영선 기자 adonis55@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