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함 열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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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필리핀 선거전은 이제 막바지다. 7일의 선거를 이틀 앞두고 긴장은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최후의 관심은 두 가지에 쏠린다. 국민은 누구를 선택할 것이며, 공정선거는 이뤄질 것인가.
20년을 지배해온 「마르코스」현 대통령은 지난 연말 타임지와의 회견에서 「코라손」의 득표 율은 20%에 불과하다. 나의 걱정은 득표수가 너무 차이가 나서 서방 언론들이 또 사기라고 하지 않을까 하는데 있다』고 미리 승리를 장담했다.
그러나 「코라손· 아키노」의 인기도 만만치 않다. 대도시 선거유세에선 필리핀선거사상 최대의 인파를 모았다고도 한다.
하지만 「코라손」의 인기가 표로 나타날 수 있을지 의심하는 사람도 많다. 그만큼 필리핀의 선거는 공정성이 의심스럽다.
이 선거철에 필리핀 국민들에겐 이른바 「좋은 일」이 계속되고 있다.
잎담배 수매 가격의 인상, 판매세의 감면, 휘발유 등 석유제품 값 인하 등 정부조처가 꼬리를 물고 있다. 물론 경제가 갑자기 호전된 건 아니다. 「마르코스」는 이번 선거에서 7억 달러 (6천3백억원)를 쓰고 있다는 보도도 있다.
공립학교 교사들에 대한 금품 살포설도 있다. 마닐라 시에선 2백∼3백 명의 교장들을 모아 크리스머스 파티를 연 다음 추첨으로 1천 페소 상당의 선물을 주었다.
교사들에게 선심을 쓰는 게 나쁠 것은 없지만 이들이 개표 종사원이 된다는데 의미가 있다.
중앙일보 특파원은 교사들에게 지급된 보너스가 3천8백만 페소 (19억원)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국영주택공사 직원들이 무허 건축지역을 호별방문, 누구에게 찍을 것이냐고 물어 여당이라고 답하면 땅값의 상환을 면제하고 야당이라고 하면 집을 부수고 전기. 수도를 끊겠다고 협박한다는 보도도 있다.
여당 유세장에는 60페소 (3천원)를 받고 버스로 동원된 사람도 적지 않다.
빈민들 중엔 「우단 나 로오브」란 다가로그어를 말하는 이도 많다. 「대통령에의 보답」 이다. 은혜를 입었으니 한 표로 보답한다는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정말 문제는 개표의 공정성이다. 84년의 총선에선 2주일이나 개표가 지연된 곳도 있었고, 유권자가 4백5명밖에 안 되는 곳에서 7백명이 투표한 것으로 집계된 투표소도 있었다. 그때 야당은『선거에 이기고 개표에 졌다』고 탄식했었다.
이번에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지난 1일 공개한 투표함 자물쇠 견본 세 가지는 각각 3개의 열쇠로 열 수 있다고 했으나 조사결과 9개의 열쇠 중 어느 것이나 열 수 있는 것으로 밝혀져 벌써 문제가 되고 있다.
이 나라 선거가 정말 「좋은 일」을 만드는 날이 올지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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