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올림픽 반세기 김성준|한 남긴 멕시코대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10월12일 상오11시15분 에스타디오 올림피카 메인 스타디움.「구스타보」멕시코 대통령의 개회 선언과 함께 제19회 올림픽의 막이 올랐다.
우리 선수단은 김영일 기수와 이병희 단장을 선두로 24번째로 입장했다.
입장식 때 8만 관중으로부터 가장 큰 환영을 받은 것은 체코선수단이었다.
체코의 자유화 운동에 대한 격려와 소련의 만행을 규탄하는 민중의 함성이 스탠드를 뒤엎을 듯했다.
우리 선수단은 붉게 타오르는 성화를 바라보며 필승의 각오를 다졌다.
선수단이 가장 강력한 금메달후보로 내세운 선수는 레슬링 자유형의 오정룡과 복싱 페더급의 김성은이었다.
안천영·김익종(이상 레슬링) 이창길(복싱) 원신희(역도)등에게는 동메달의 기대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예상대로 성적을 올리지 못했고 대신 기대하지 않았던 선수들이 선전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지용주(복싱라이트 플라이급)가 은, 장정길(밴텀급)이 동을 따냈을 뿐 나머지 선수들은 모두 탈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김성은은 1회전에서 일본의 메달 후보 「오까모또」(강본충)를 3-2 판정으로 이겼으나 2회전에서 터키의 「세이피·타타」에게 3-2로 판정패했다.
레슬링 자유형 플라이급의 오정룡도 3회전에서 「시게오」(일본)에게 판정패 당한 것이 치명타가 되어 벌점 관계로 탈락하고 말았다.
67년 세계 레슬링선수권대회 동메달리스트인 오정룡과 66년 방콕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인 김성은의 불운은 선수단을 침통한 분위기 속에 몰아 냈었다.
특히 김성은은 출국 전 태릉선수촌에서 열심히 연습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김성은은 항상 입술이 터져 있었는데 『일생일대에 한두번 밖에 찾아오지 않는 올림픽 출전이다. 금메달 획득에 젊음을 걸겠다』면서 밤낮 없이 훈련에만 매달려 부르튼 입술이 나을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다.
김은 그로부터 16년 뒤인 84년LA올림픽에 복싱 감독으로 참가, 복싱사상 첫 금메달(신준섭)의 꿈을 이루었다.
안천영도 3회전 「카야」(터키)와의 경기 2라운드에서 늑골이 튀어나오는 부상을 했으나 『매트 위에서 죽겠다』며 초인적인 정신력을 발휘, 8-5로 판정승을 거두었다.
경기 직후 안은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후송됐다. 모두들 다음 경기는 포기할 것을 종용했지만 안은 『이 고비만 넘기면 메달권이다』며 몸에 붕대를 칭칭 동여매고 출전했다.
안은 결국 4회전에서 「모스치디스」(그리스)에게 판정패, 탈락했으나 그 불굴의 투혼이 놀라왔다.
개막식 다음날인 13일 여자배구가 첫 경기에서 폴란드에 3-2로 역전패 당한 것도 무척 아쉬웠다.
l,2세트를 15-10, 15-12로 따낸 뒤 3,4세트를 10-15, 12-l5로 뺏겨 타이를 이룬 뒤 마지막 세트 체력의 열세로 최종 마무리에 실패, 15-17로 지고만 것이다.
우리 선수들은 분을 삭이지 못해 엉엉 목을 놓아 울었으며 나도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쳤다.
여자배구는 최종전적 3승4패로 목표했던 5위틀 차지하기는 했다.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대폴란드전을 이겼더라면 올림픽 구기 사상 첫 메달의 감격은 몬트리올 대회 때까지 늦춰지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여자배구팀엔 감독이 없어 박무코치에게 모든 비난이 쏟아졌다.
주전선수들의 체력이 떨어져 허덕이는데도 과감한 선수 교체를 안했다는 의견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전과 후보의 수준차가 심한 점이나 국제경기 경험 부족을 감안하면 코치만을 원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