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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융성 정부 체육은 죽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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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9호 25면

지난 20일 서울 광화문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난 이에리사 전 의원은 “정부의 체육 행정이 보여주기?생색내기 식으로 흘러가선 안 된다. 체육인을 존중하고 체육의 가치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민규 기자

지난 14일 서울 방배역 근처에서 만난 그는 몸빼바지를 입고 동네 마실 나온 아낙네 같았다. 이제 더 이상 국회의원이 아닌 이에리사(62) 전 의원은 편안해 보였다.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제19대 국회의원을 지낸 그는 20대 총선 지역구(대전 중구) 출마에 도전했으나 공천을 받지 못했다.


애초 그를 만난 건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기획 기사에 코멘트를 받기 위해서였다. 이 전 의원은 1973년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체전 우승 주역이자 2005년부터 4년간 태릉선수촌장을 지낸 ‘스포츠계의 대모(代母)’다. 체육인을 대표해 19대 국회에 입성한 그는 4년간 28개 법안을 발의했다. 그 중에는 ‘체육인복지법’도 있었다.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체육인들을 돕기 위한 법안이었다. 하지만 법안심사소위원회도 통과하지 못했다. 그에게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 어떻게 사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우리는 커피숍에서 마주앉았다. 여의도에서 지켜본 체육계 현주소, 꼭 이루고 싶었지만 완결하지 못한 일들에 대해 물었다. 편안하던 그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는 대한민국 체육이 그 위상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하는 현실이 슬프다고 했다. “문화융성 정부에서 체육은 죽었다”고까지 말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요즘 체육계에는 ‘마린보이’ 박태환(27)의 올림픽 출전을 둘러싼 논란,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 통합에 얽힌 갈등, 리우 올림픽 선수단 여성 부단장 선임을 둘러싼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체육회의 힘겨루기 등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에리사가 바라본 한국 체육의 현실’로 주제를 급히 바꿔야 했다.


7월 20일, 광화문에서 이 전 의원을 다시 만났다. 이번엔 말쑥한 정장 차림이었다. 여성가족부 장관이 19대 비례대표 여성 의원들을 초대한 자리였다. 두 번의 만남에서 나온 얘기들을 정리했다.


-아쉽게 20대 국회에 입성하지 못하셨는데.“제가 떨어진 건 제 부덕의 소치라 생각해요. 문제는 여·야를 통틀어 엘리트 체육인 출신 의원을 한 명도 내지 못했다는 겁니다. 어느 당 소속이든 체육인 출신이 있어야 체육계 현안을 대변할 수 있을 텐데. 그만큼 체육인들의 표가 과소평가 되고 있는 거죠.”


-의정 활동 중 가장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체육인복지법을 발의했는데 통과되지 못한 게 가장 안타깝죠. 문화계에는 예술인복지법이 올해 2월 공포돼 힘들게 사는 문화예술인을 돕고 있거든요. 그것처럼 스포츠로 국위를 선양하고 국민에게 기쁨을 준 분들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고 싶었는데…. ”


-국립체육박물관 건립 예산을 확보한 건 자랑스런 업적이지 않습니까.“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제가 ‘이거 안 통과시켜 주면 집에 못 간다’고 고집을 부려 어렵게 예산을 받았어요. 그런데 당초 450억원에서 250억원으로 예산이 절반 가까이 깎였어요. 대한민국 체육 100년의 빛나는 역사와 유물을 전시할 국립체육박물관을 제대로 만들려면 450억원도 적다고 봅니다.”

우여곡절 끝에 리우 올림픽에 출전하게 된 박태환(왼쪽). ‘피겨 여왕’ 김연아는 까다로운 서훈 규정 때문에 정부로부터 체육훈장을 받지 못했다.[뉴시스, 중앙포토]

선수 도와야 할 체육회가 뒷다리 잡아우여곡절 끝에 박태환의 리우 올림픽 출전이 확정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대한체육회는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그 배후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있다는 말들이 돌았다. 리우 올림픽 선수단 여성 부단장 선임 과정에서도 볼썽사나운 장면이 연출됐다. 김종 문체부 제2차관과 김정행 대한체육회장이 각기 다른 인사를 추천한 것이다. 김 회장은 자신의 몫인 부단장 선임까지 간섭하는 김 차관에 대한 항의 표시로 지난 8일 체육회 이사회에 불참했다. 이 회의는 박태환의 올림픽 출전 여부를 최종 결정하는 자리였다.


-박태환이 찾아왔다면서요.“도핑 적발로 인해 징계 중이던 지난해 봄에 만났어요. 그 자리에서 ‘태환아, 이제 그만 은퇴해라’고 했더니 ‘아닙니다. 명예회복 꼭 할 겁니다’라고 강하게 말하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니 선배로서 참 측은했어요. 다행히 본인이 노력해 올림픽 출전 기록을 넘어섰고 국내 법원과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서도 올바른 결정을 내려줬어요. 그런데 선수를 지원하고 격려해 줘야 할 대한체육회에서 오히려 선수의 앞길을 막는 모습을 보이니 어처구니가 없었죠.”


-“박태환이 제2의 안현수가 될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요.“박태환이 리우 가서 메달 딸 가능성이 크지는 않아요. 도핑에 대한 책임도 100% 선수에게 있어요. 그러나 세계를 제패했던 대한민국의 수영 스타가 올림픽 무대에서 명예회복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줘야죠. 2011년에 CAS는 금지약물 징계를 받은 선수의 다음 올림픽 출전 금지를 규정한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오사카 룰’이 무효라고 결정했어요. 그런데도 대한체육회가 이중처벌로 판명난 자체 규정을 앞세워 몽니를 부렸으니 이 나라가 싫어지지 않겠어요.”


-이 와중에 리우 선수단 부단장을 놓고도 분란이 있었죠.“한마디로 코미디죠. 단장과 부단장은 선수와 지도자들을 뒷바라지 하는 역할이지 감투가 아니에요. 그런데 문체부 체육담당 차관과 대한체육회장이 그 자리를 놓고 파워게임을 벌였습니다. 올림픽은 정부와 온 국민이 힘을 모아줘도 쉽지 않은 무대입니다. 그런데 엉뚱한 데서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으니 가슴이 아픕니다.”


이 전 의원은 4년 동안 많은 일을 했다. 대한민국체육유공자법을 통과시켰고, 프로 선수들도 도핑 테스트를 받도록 법제화 하는 데도 앞장섰다. 태릉선수촌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 국가 예체능계 우수장학금을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뛰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체육인의 위상이 형편없이 낮고, 국가는 체육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문체부 체육분야 전문성 떨어져-문체부에서 체육 관련 예산도 늘어나고, 체육 담당 실세 차관도 있는데요.“늘어난 예산은 대부분 평창 올림픽 지원용입니다. 국가는 올림픽 같은 국제 이벤트 때만 반짝 체육에 관심을 갖는 척하다가 끝나면 관심을 꺼버립니다. ‘엘리트 스포츠’라는 이미 핀 꽃을 자랑만 하는 거지요. 김연아 선수도 청룡장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체육훈장 서훈 기준을 높이려고 했을 정도니까요. 체육인들은 당연히 찾아먹어야 할 몫도 못 찾아먹는 상황이죠….”


지난해 6월, 아시안게임(1990년 베이징) 역도 금메달리스트 김병찬(당시 46세)씨가 고독사 했다는 뉴스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는 96년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됐고, 2014년에는 식도암 판정까지 받았지만 국가로부터 어떤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그가 받는 메달리스트 연금(월 52만5000원)이 보건복지부의 최저생계비 지급 기준(49만9288원)보다 많았기 때문이었다. 올해 6월에는 그가 받았던 메달과 상장 등이 고물상에 넘어갈 뻔할 일도 있었다. 이 전 의원은 “대학 운동부와 아마추어 종목 실업팀이 자꾸만 없어지고 있어요. 그러면 엘리트 선수들이 은퇴 후에 지도자로 갈 길이 좁아지고, 선수들의 수준도 점점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라고 안타까워했다.


-엘리트 스포츠(대한체육회)와 생활체육(국민생활체육회)이 합쳐지면서 저변이 넓어지고 엘리트 체육인들에겐 더 많은 기회가 생기는 것 아닌가요.“엘리트 스포츠와 생활체육이 하나가 된다는 명분은 좋아요. 그런데 엘리트 스포츠에서 세계적인 스타가 나와야 그 종목의 생활체육도 발전하는 겁니다. 지금은 통합의 명분 아래 엘리트 선수들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게 문제지요. 그리고 생활체육은 모든 국민이 즐기는 거지만, 엘리트 스포츠를 하는 사람들은 그 운동 자체가 직업이고 가족의 생계수단입니다. 직업인으로서 먹고 살 길은 찾아줘야죠.”


이 전 의원은 4년간 의정활동을 하면서 문체부에 대해 섭섭한 점이 많았다고 털어놨다. “누구보다 체육인을 돕고 살펴야 할 분들이 정작 필요할 때는 나서지 않고, 권한과 예산만 휘두르는 경우가 많았어요. 체육에 대한 전문성이 떨어지고, 좀 알만 하면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하던 직원과 교체되는 경우도 잦았죠.”


이 전 의원은 ‘스포츠계의 야당’이 되겠다고 했다. 국가가 체육의 가치를 인정하고, 체육인들이 자존감과 보람을 갖고 살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겠다고 했다. 통합 체육회장 선거는 리우 올림픽이 끝난 뒤인 10월 5일에 열린다. 이 전 의원을 비롯한 19대 국회의원과 현직 국회의원 및 정당인은 출마하지 못한다. 대한체육회장 선거관리규정에서 ‘후보자 등록 신청 개시일로부터 과거 2년 동안 정당의 당원이었던 사람은 후보자가 될 수 없다’고 못박았기 때문이다. 이 전 의원은 대한체육회에 대한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그 동안 당대 최고 권력과 금력을 가졌던 분들이 체육회장을 했어요. 그 그늘 아래서 자생력과 야성을 잃어버렸어요. 올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 10명만 힘을 합쳐도 대한체육회를 바꾸고 대한민국 체육을 바꿀 수 있을 겁니다.”


정영재 스포츠선임기자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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