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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보 DMV와 양파 검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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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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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얼마 전 미국 근무 1년이 되면서 운전면허증 갱신을 했다. 비자는 5년짜리를 주면서 운전면허는 왜 1년마다 갱신해야 하는지도 이해가 안 갔지만 그보다 더 이해 불가였던 건 갱신 업무를 담당하는 교통국(DMV)의 태도. 오전 8시에 문을 열자마자 들어갔지만 내 순서를 부르는 데 2시간, 서류 접수 후 또다시 호출하는 데 1시간30분이 걸렸다. 거의 녹초가 돼 창구로 갔더니 “체류요건을 좀 더 확인해야 한다”며 2주일 후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란다. 물론 2주일을 기다려도 전화는 안 왔다. 이후 몇 번을 독촉해 결국 얻은 답은 “다시 DMV로 가봐라”. 다시 원점에서 시작해 면허증을 손에 쥔 것은 한 달 넘게 지난 후였다. 알고 보니 나만의 경험이 아니었다.

디즈니 영화 ‘주토피아’에서 도장 한번 찍는 게 슬로모션보다 느린 DMV의 나무늘보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관객들이 웃음을 터트리고 박수갈채를 보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일 처리가 더디다 못해 느려터진 DMV는 미국 내에서 조롱과 비난의 대표선수다.

한국 영화에선 DMV 같은 존재가 검찰이다.

‘내부자들’이나 ‘검사외전’ 등에선 검사를 권력지향적이고 음험한 존재로 묘사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선 범죄도 불사한다. 지나치게 편협하게 묘사한 부분도 많지만 관객이, 국민이 통쾌해하는 건 모두 이유가 있다.

전직 검사장 홍만표는 ‘정운호 게이트 100억원대 수임료’로, 현직 검사장 진경준은 ‘넥슨 126억원 주식 대박’ ‘한진그룹 수사 무마 130억원 일감 몰이’ 혐의로 구속됐다. 비리 규모도 이젠 억 단위, 십억 단위는 쳐주지도 않는지 모두 100억원이 넘는 종합백화점 수준이다. 여기에 검찰 출신 우병우 민정수석의 처가 부동산 매각에 우병우→진경준→넥슨의 3각 고리 의혹까지 터져 나왔다. 의경 아들 상사 봐주기에, 농지법 위반 의혹까지 나온다.

이쯤 되면 까도 까도 또 비리가 나오는 ‘양파 검찰’이란 조롱을 들어도 싸다. 문제는 이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에도 근원적 해결을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검찰 조직은 이질적이다. 34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검사가 직접수사와 수사지휘, 공소제기와 공소유지를 전부 하는 곳은 우리밖에 없다. 법무장관에 장관급 검찰총장, 50명에 달하는 차관급 검사장을 지닌 조직은 아마 전 세계에서 전무후무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포함해 역대 정권 대부분도 이를 알고 대선 공약으로 ‘검경 수사권 조정’을 내세웠다. 하지만 모두 유야무야다. 곪을 대로 곪았지만 어느 누구도 고름을 터트리지 않으려 하는 동안 우리 공권력은 허수아비가 됐다. 그러니 대통령 부재 중에 총리와 국방부 장관이 시위대에 사실상 6시간 동안 감금됐어도 대다수 국민은 무덤덤하다. 이쯤 되면 제대로 된 국가라 할 수 없다. 고위공직자수사처 설치 등 뭐라도 해야 할 때다.

‘느림보 DMV’야 1년마다 꾹 한번 참으면 되지만 ‘양파 검찰’은 이제 인내의 한계를 넘어섰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