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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부는 보호무역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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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렬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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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렬
뉴욕특파원

도널드 트럼프가 공식적으로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되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편향된 인식이 어느 정도 바로잡힐 것이란 기대는 순진한 것이었다. 트럼프는 공화당 대선 후보 수락연설에서 기어이 한·미 FTA를 “(미국의) 일자리를 죽이는 무역협정”이라고 규정했다. 한·미 FTA 이후 미국의 서비스 수지 흑자가 2011년 69억 달러에서 2015년 94억 달러로 늘어난 팩트는 반영되지 않았다. 한·미 FTA가 지난해 미국 측의 상품 수지 적자를 157억 달러 줄이는 데 기여했다는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 분석도 무시됐다. 자유무역이 가져다준 이득엔 철저히 눈감고 미국 제조업의 쇠락을 오로지 FTA 탓으로 돌린 것이다. 그는 공화당이 신봉해 온 자유무역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보호무역의 깃발을 꽂았다.

미국의 주류 미디어와 통상 전문가들은 트럼프의 보호무역 주장이 “시대 착오적인 발상”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통상 현장에선 이미 ‘미국 일자리 우선’에 기반한 무역장벽이 높게 올라가고 있다.

최근 국내 철강제품에 대한 미국의 덤핑 판정은 충격적이다. 미국 상무부는 포스코의 냉연강판에 58.4%의 상계관세를 때렸고, ITC는 현대제철의 도금강판에 47.8%를 매겼다. 업계로선 예상하지 못한 고율 관세다. 8월 초 나올 열연강판에 대한 덤핑 판정도 비관적으로 전망되고 있다.

높은 관세율도 문제지만 심상치 않은 대목이 더 있다. 워싱턴DC의 통상 관계자는 “이번엔 우리 정부가 덤핑 판정을 막아 보려고 나름대로 적극적으로 뛰었다. 그런데도 먹히지 않았다”고 했다. 현대제철의 경우엔 사정이 남다르다. 수출품의 대부분이 현대차의 앨라배마 공장과 기아차 조지아 공장에서 소요된다. 두 공장 모두 미국 남부 지역 일자리 창출의 일등 공신이다. 조지아와 앨라배마 지역 정치인들이 덤핑 판정을 막기 위해 지원사격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선 국면에서 철강노조의 압력에 직면한 미국 정부가 안면 몰수하고 나선 것이다.

한 통상 전문가는 “20여 년간 통상 업무를 해 왔지만 지금처럼 보호무역주의적인 색채가 강한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관세장벽은 수출업체엔 치명적이다. 2014년 9.89~15.75%의 반덤핑관세를 맞은 유정용강관(OCTG) 업계가 하나의 사례다. 업계는 초토화됐다. 셰일가스 특수를 누렸던 포항의 한 업체는 부도가 났다. 한때 400여 명에 달했던 직원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제 철강업계의 주축인 도금·냉연·열연강판 라인과 직원들의 고용이 위태로워질 판이다.

안타까운 것은 미국의 보호무역 기조가 더 강해지면 강해졌지 약화될 요인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집권 후 보호무역 기조 강화를 선전하고 있다. 양쪽에서 자유무역 옹호론자들의 목소리는 점점 힘을 잃고 있다. 세계 자유무역의 수호자였던 미국이 보호무역의 폭군으로 돌변하는, 상상하기 싫은 상황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이상렬 뉴욕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