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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만군옥려, 진운하던 비단길이 아스라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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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고고학자이며 전 실라박물관장이었던 「J·마셜」씨의 화려한 공관은 지금 박물관의 명사로 쓰이고 있었다. 조사단 일행이 이곳을 출발한 것은 지난해 12월18일 아침 7시쯤. 이렇게 새벽같이 떠난 것은 타실라에서 기르기트까지가 6백km가 넘는 먼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10일간의 계약으로 이슬라마바드에서 빈 밴 차의 운전기사는 주로 카라코룸 하이웨이와 간다라만을 수년간 달린 노련한 솜씨의 소유자였다. 그래도 그는 한시간에 40km이상은 달릴 수 없었다.
도중에 사고 없이, 휴식 없이 계속 달려도 15시간은 걸린다는 계산이고 보면 어차피 그 중간에서 하루를 쉬어 가야 했다. 하물며 오후5시 이후의 통행은 군에 의해 금지되고 있는 지역을 달린다는 것이 더욱 조심스러워 쉴바에는 기르기트에 가까운 곳에서 쉬려고 출발을 서둘렀던 것이다.

<인명 희생을 뉘우쳐 말년께 불교에 귀의>
걱정스럽던 날씨는 그날 따라 쾌청해 보였다. 마치 우리 나라의 초가을 같은 기온이었다. 파랗게 펼쳐진 밭과 산호색 감귤 밭 사이로 난 아스팔트길을 달려 카라코룸 하이웨이의 깃점이라는 하베리안을 지났다. 탁실라에서 약1백40km지점인 만세라를 조금 지나 나지막한 산길에서 차를 멈췄다.
휴식로 휴식이었지만 마우리아 왕조의 최대영주 「아쇼카」왕 (아육왕 BC273∼BC232년)의 암각법칙이 보고싶었기 때문이다.
인도남단인 타미르지방을 제외한 인도대륙의 거의 전역을 영토화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킨 것을 크게 뉘우쳐 말년에 깊이 불교를 믿게된 「아쇼카」왕.
그는 불교를 장려하고 불교덕목 중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최소한의 덕목을 비에 적어 전국에 세웠으며 그 중에서도 만세라의 이 비는 오랜 것에 속한다.
간다라·스와트·카라코룸 지방에서 16세기 무렵까지 쓰여졌던 이란계의 고대 카로슈티 문자로 바위에 새겼던 이 법칙은 지금은 세 조각으로 갈라져 그중 두 조각은 길 아래쪽 양철지붕이 씌워진 헛간 같은 곳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는데 찾는 이의 발걸음도 드문 것 같았다.
여기서 우리는 천막촌을 목격했다. 바로 서남쪽 평지에 사람이 겨우 기어서 출입할 수 있을 만큼 낮고 낡아서 찢어진 천막촌의 비참한 모습.
안내를 맡은 「무하메드·칸」씨는 그것이 아프가니스탄의 피난민 촌이라고 했다.
무자비하게 남의 목숨을 빼앗았던 잘못을 뉘우치며 세웠던 「아쇼카」왕의 암각법칙 앞에 보이는 전쟁피난민들의 굶주린 얼굴과 마을의 참상, 암만 보아도 그것은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일면을 노출시킨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숭고한 종교의 이념과 감화력도 차가운 현실 앞에선 그 한계성이 보여져 잠시 야릇한 감상에 사로잡혀 있는데 돌연 『이 지역에서 혼자서 다니면 아주 위험해요. 아프가니스탄 난민가운데는 어수룩한 곳에서 도적으로 돌변해 행인을 해치는 일이 가끔 있다니까요』라며 내뱉는 듯한 「칸」씨의 차가운 목소리가 우리의 상념을 깨뜨렸다.
만세라에서 서북쪽으로 달리는 7O여km의 평탄한 아스팔트길은 지리하기 짝이 없었다. 카라코룸 하이웨이를 달린다는 기분이 도무지 나지 않는 길이다. 그때였다.
『오! 인더스 강. 저것 보시오. 우리의 인더스 강!』하며 「칸」씨가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놀라서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첩첩으로 둘러싸인 산과 산의 골짜기를 따라 흘러 내려오는 인더스 강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듯이 펼쳐져 있었다.

<인파 속엔 여인 없어 어린 소녀도 안 나와>
차가 인더스 강을 따라 북으로 얼마 안가 베샴이란 곳에 닿았다.
이곳에선 적지 않은 도시로 알려진 곳이지만 우리 눈엔 시골마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그럭저럭 12시가 지났다.
모두 허기와 피로에 지쳤으나 쉴만한 식당이 없었다.
겨우 찾게된 것이 인터내셔널호텔. 이름은 거창하나 제대로 청소도 안 해 엉성하고 어두운 고층건물의 식당이었다 .메뉴는 이곳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는 얄팍한 호떡과 커리에 쇠고기를 무쳐서 끓인 것 뿐.
길은 여기서부터 크게 험해진다. 쏟아 내리는 인더스강물을 따라 겹겹으로 막는 산허리를 뚫고 달려야 하는 차는 엉금엉금 거북이 걸음이다. 점점 숨가쁘게 가팔라지는 데다 커브가 연속, 운전기사의 핸들 잡은 손은 잠시도 쉴 틈이 없다. 구곡양장이란 말은 바로 이곳을 이름이리라.
일찍이 이백이 장안에서 사천까지의 험준한 산길에서 읊었듯이 흰 구름은 바로 「말머리를 쫓아 솟아오르고(방마두기)」라는 절묘한 귀절이 되새겨지는 산길이었다.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리는 흙과 돌덩이를 피하면서 베샴에서 1백55km북방의 사진이란 곳에 도착했을 때는 모두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산골의 구석진 면소재지 정도의 인상을 주는 사진의 거리는 노점상 사이로 쏘다니는 사람들로 붐비고 값싼 중공제 일용품과 직물이 많이 눈에 띄었으나 기이한 것은 그 많은 인파 속에 여자라고는 단 한사람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남녀관계를 엄격히 규정하는 이슬람교의 율법에 따라 이 나라에선 카라치나 라호르 같은 국제도시를 제외하면 이슬라마바드나 페샤워르 같은 대도시에서도 여자의 그림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특히 기르기트 하이웨이에서는 어린 소녀조차 집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었다.
베샴에서 든 점심에서 코를 찌르는 커리 냄새 때문에 비위를 상한 몇몇 사람은 이곳에서 가장 싼 바나나로 요기한 후 지친 몸으로 다시 이곳을 떠났다.
인더스 강을 따라 끝없이 닦여진 산길을 북상하면서 느낀 것은 생명의 보존을 위한 인간의 끈질긴 노력은 이 같은 심산계곡의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베샴을 지나 파탄의 계곡에 이르르면 인더스 강 양안의 고산준령엔 마치 나무에 매달린 새둥지 같은 민가가 절벽의 반반한 곳을 골라 채광창도 없이 진흙으로 여기저기 지어져있고 그 옆으로 조그만 길이 보이며 그 아래로는 돌로 차근차근 쌓아올린 둑 외에 손바닥만한 밭들이 일구어진 정경을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가끔 염소 몇 마리가 풀 한 포기도 찾아보기 힘든 벌거숭이산을 헤매며 먹이를 찾고 있다.

<옛 영주세력이 반발 곳곳에 민병·정규군>
거의가 돌과 거친 모래땅이어서 우리 생각엔 버릴 땅 같지만 그 속에서도 생활이 있고 생활의 터전인 가정과 가정의 터전인 사랑의 힘을 이 지방의 자연조건과 움집 같은 민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가끔은 자치를 요구하며 중앙정부의 행정력행사에 반발하는 옛 영주들이 있어 그들의 작당과 행패로 치안상태가 그리 좋은 편이 못된다는 이 산길엔 여러 곳에 민법과 정규군이 주둔하는 천막이 눈에 띄어 우리를 긴장시켰다.
앞길을 예측할 수 없는 숨막히는 골짜기 길을 한없이 가다가 인더스 강이 크게 구부러지는 지점에서 차가 급정거한다. 앞에서 달리던 차가 10여대나 밀려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곧 차량의 왕래가 금지된다는 오후5시 조금 전이어서 초조해하면서 영문을 알아보니 산에서 큰 바위가 떨어져 그 제거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민병대 초소에서 여권까지 제시하고 이름·여행목적을 밝혀야하는 엄격한 검문을 받은 다음 이 부근에선 제일 큰 도시라는 칠라스의 샹그릴라 호텔에 짐을 푼 것은 오후5시30분쯤.
인더스 강변의 이 호텔에서 바라보는 산들은 대부분 흰눈을 덮고 있었으나 정원의 장미는 지금이 한창이며 감귤나무의 탐스러운 열매도 저물어 가는 햇빛을 받아 주황색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었다.
호텔 맞은편엔 l천2백년 전 우리의 고선지 장군이 만군을 호령하며 통과했을 옛 비단길과 새로 지은 상가의 모습이 차츰 어두움 속에 잠겨가며 가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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