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혈지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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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교통사고로 입원중인 조치훈 기성이 16일 열리는 제10기 기성전 제1국에 휠체어를 탄 채 출전키로 했다.
승부의 세계가 얼마나 비정한가를 느끼게 한다.
조 기성은 최근 고국 팬들에게 새해 인사를 하는 글 가운데 『지난번 새해 명인위를 뺏긴데 대해 부끄럽기 그지없으며, 그래서 새해 인사를 고국 땅에서 드리고 싶었는데 패자가 무슨 염치로 얼굴을 내밀 수 있겠는가. 그러나 두번 다시 이런 실패를 범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였었다.
조 기성이 이번에 도전자로 맞은 상대는 바로 작년에 그로부터 명인위를 뺏어간 「고바야시」(소림광일) 9단. 최근 일본 바둑계에서 욱일 승천하며 명인·십단·천원의 3관왕을 차지한 조 기성과 동문수학한 기사다.
최근 바로 그 「고바야시」 9단과 마지막 도전자 결정전 대국에서 맞선 「가또」(가등정부) 9단이 모두 삭발한 일이 있었다.
일본 바둑계는 지난해 11월에 있은 일본·중공 8강 대항전 이후 마치 초상난 집의 꼴이 되었다. 그것은 「후지사와」(등택수행) 9단을 포함한 이들 일본 최강의 기사들이 중공의 섭위평 9단에게 모두 참패를 당한 것이다. 이를테면 팬들 앞에 석고대죄의 삭발을 한 것이다.
바둑 종주국임을 자처하는 일본 바둑의 역사를 보면 바둑을 두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었다. 강호시대엔 명인전을 어전에서 두었는데 그때 「아까호시」(적성인철) 같은 기사는 대국 중 피를 토하고 죽어 유명한 「토혈지국」이란 말이 나오기도 했다.
조 기성은 선천적으로 위장이 튼튼하지 못하다. 그래서 대국 중에 신경이 날카로워지면 토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고 한다. 그것을 하품하는 것으로 대신한다고 그는 말한다.
조 기성은 어느 글에선가 「고바야시」를 가리켜 『그는 스스로 바둑이 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바둑판에 임한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못하다. 정신력이 모자라지는 것이 아니라 약하기 때문에 지는 것이다』고 평한 일이 있다.
그러나 조 기성은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와 다르다고 했다.
그 「고바야시」와 휠체어를 타고 하는 대국에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까. 조 기성이 이기면 그야말로 진짜 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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