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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팀장의 할 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74년 9월 경제팀 개편 때 태완선 부총리가 물러가고 그 자리를 남덕우 재무장관이 옮겨 앉았는데 남 장관이 재무부 기자실로 이임 인사차 와서는 약간 긴장할 때 나오는 특유의 몸짓-왼쪽다리를 슬슬 쓰다듬으며 하는 말이 『태 부총리가 훌훌 털고 떠나는 걸 보니 정말 부러운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었다.
1차 오일 쇼크의 와중에서 경제팀장을 맡은 남 부총리로선 한편으론 기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떠나는 사람이 부러울 정도로 무거운 책임을 느꼈을 것이다.
경제가 무척 어려운 중에 재무장관에서 경제팀장을 맡은 김만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도 비슷한 심경이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면 두 사람 사이엔 비슷한 점도 많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대학 강단에서 정부로 옮겨가 성공, 장수한 것도 그렇고 일하는 스타일도 많이 닮았다. 현실적 원칙론자로서 외유내강의 유연성으로 휘청휘청하면서도 목표를 잃지 않고 마음먹은 일을 이뤄놓는다.
경제팀장이란 자리는 사람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많은 일을 할 수도 있고 가만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부총리란 타이틀이 붙어있고 장관 등 다른 자리에서 경험을 쌓은 후 옮기는 것이 보통이다. 재무장관 경험자가 가장 많아 김학렬·남덕우·김원기씨에 이어 이번 김만제 부총리가 네 번째이고 박충훈·신병현·고 서석준 부총리는 상공장관에서, 태완선 부총리는 건설장관에서 옮겼다. 신현확 부총리는 부흥·보사장관을, 김준성 부총리는 한은 총재를 거쳤다.
경제팀장의 스타일은 각각 다른데 큰 추세를 보면 시계추같이 움직인다. 일을 벌이는 사람 뒤엔 챙기는 사람, 그 다음은 다시 벌이는 사람으로 교차한다.
경제란 양면성이 있어 일을 벌이면 벌이는 대로, 챙기면 챙기는 대로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후임자는 반사적으로 미흡했던 부문에 중점을 두게 마련이다.
김 부총리가 신임포부로 고용확대와 투자진작을 강조하고 취임 후 첫 일요일에 구로 공단에 직접 나가 현장확인을 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미흡했던 부문, 그늘졌던 부문에 역점을 둘 때 확실히 효과는 나타난다. 그러나 이때가 경제팀장의 첫 함정이다. 긴장이 자신으로 바뀌고 그것이 지나치면 아집으로 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인플레에 고생한 나머지 안정화정책에 도전, 그걸 어렵게 이뤄놓고 나면 거기에 안주하기 쉬운 것이다.
그걸 어떻게 이룬 것인데 하고 너무 애지중지하다 보니 시대의 흐름이나 국민의 새로운 욕구를 간과하는 것이다.
지금은 물가가 안정되어 있으니 실업이나 투자부진이 발등의 불이 되고 있지만 만약 그걸 어느 정도 좋게 하고 나면 물가가 다시 쟁점이 될 것이다.
경제는 다 좋을 수는 없어 실업이나 투자부진을 개선하려면 물가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지금은 세계 경기침체에다 원유 등 국제원자재 값의 안정, 수출부진 등이 물가 안정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데 다행히 경기가 좋아지면 많이 풀려있는 통화와 겹쳐 큰 인플레요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경제팀장은 정책순환의 밸런스 감각이 탁월해야 하고 시대적으로 변하는 국민적 욕구를 민감히 감지, 대응해야 한다.
경제팀장의 또 하나 어려운 점은 경제를 유연하게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경제는 경제정책만으로 잘 될 수가 없다. 경제 외적 요인으로부터 부단히 영향받고 또 영향을 준다.
과거 경제의 시행착오 중에는 경제 외적요인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 많다.
그런 사태가 안 일어나려면 경제팀장이 능소능대하게 잘 대응해야 한다. 그러나 겸손한 경제팀장일수록 『그건 경제 밖의 일이니까…』하고 적당히 하다가 그 주름을 경제에서 몽땅 뒤집어쓰는 경우도 많다. 너무 곧아 부러져서도 안되지만 너무 심(芯)이 없어서도 안 된다.
경제정책의 이상은 가용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동원, 배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자원사용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일에 초연해선 곤란한 일이다.
가령 올림픽이나 박물관 짓는 것은 경제외적 일이니 그걸 제쳐두고 경제만 잘하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적 자원뿐 아니라 인적자원의 배분에도 잘 하겠다는 적극성이 필요하다. 가장 근본은 역시 인사다.
공정한 인사로써 적재를 적소에 쓴다는 인식이 널리 공감돼야 전반적인 창의성과 일할 보람을 유지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요즘 특히 관계에서 『창의성을 갖고 적극적으로 일을 하라』는 소리가 많이 나오는데 그걸 말로 할 것이 아니라 인사를 공정히 하면 저절로 그런 분위기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부실기업문제 등 금융에 일일이 간여하기보다 한은법에 규정된 대로 「고결한 인격과 금융에 관한 탁월한 경험을 가진 사람」을 한은 총재에 앉도록 하는 것이 일을 바르게 푸는 길일 것이다.
인사가 흐트러져있는데 경제정책이 잘 될 수도 없고 또 신뢰를 받을 수도 없다.
경제팀장의 또 하나 함정은 물러갈 때를 놓치기 쉽다는 점이다. 처음엔 긴장과 의욕으로 시작했다가도 시일이 감에 따라 그것이 풀어질 수도 있고 또 시대의 변화에 따라 안 맞을 수도 있는데 그걸 알기 어렵다.
시대의 흐름에 뒤지면 본인은 무척 노력하고 소신 있게 한다 해도 밖으론 엉뚱한 고집을 부리는 것으로 비치기 쉽다.
경제장관에서 경제팀장으로 옮긴 경우엔 사태의 파악이 빨라 기민하게 대응한다는 장점도 있지만 자신에 일찍 빠지는 경우가 많다. 또 이미 장관 때 해놓은 일은 보호하며 새롭게 일을 하려면 그 폭에 제약을 받기 쉽다.
따라서 좋을 때 물러가는 것도 큰 행운에 속하는데 경제팀장의 거취는 자의만으로 안 되는 것이니 그건 운에 맡길 수밖에 없다.
만약 신병현 부총리가 실업이니, 불황이니 하는 것이 심화되기 전 안정화정책이 열매를 맺었을 때 물러나는 행운을 잡았더라면 「물가안정의 꽃길을 즈려 밟고 퇴장하는」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 되었을 것이다.
최우석

<편집국장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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